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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Apr 03. 2021

비 오는 타이베이를 즐기는 법

#3. 타이베이 2016 (3)


봄비로 시작한 하루


 여행 가서 비가 내리면 심하게 짜증 난다. 어쩌다 잠시 내리는 부슬비는 괜찮다. 할 거 다 하고 맞이하는 비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아침부터 줄곧 내리는 비는 전혀 반갑지 않다. 흐린 하늘도 하늘이지만, 그날 할 수 있는 것들이 대폭 줄어든다는 점에서 여행에 매우 치명적이다. 자칫하면 일정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타이베이에서의 셋째 날, 새벽부터 비가 줄곧 내리기 시작했다. 한 번에 내렸다 그치는 소나기도 아니었고, 빗줄기만 봐도 '아 이건 하루 종일 내리는 비다'라는 느낌이 오는 그런 비였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착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름 다행이었던 건, 오늘은 이렇다 할 계획이 별로 없는 하루였다는 점이다. 솔직히 이렇게 대책 없는 여행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 준비 없던 하루였다. 


 나는 재수 좋은 놈?이었다. 이 비가 오히려 내 여행을 장기적으로 더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전날 흩뿌리던 비를 맞으며 등산을 해서 그런지, 새벽 일찍 일어나며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감기몸살 기운이 스며든 것이다. 만약 아침부터 빡빡한 일정이 있었다면, 그 일정들을 당연히 소화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강행하자니 몸이 아프고, 쉬자니 여행을 즐기지 못한다는 스트레스가 찾아왔을 게 뻔하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계획마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푹 쉴 수 있었다. 마음 편히 단잠에 빠져서 그랬을까? 창틀을 내리치는 빗소리마저 기분 좋게 들렸다. 타이레놀을 먹고, 그 상태로 한 3시간을 잠들었던 것 같다. 유난히 큰 빗방울 하나가 창틀을 '텅'하고 강타하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다시 깼다. 몸상태는 신기할 정도로 개운했다. 시계는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순간이었다. 


 계획은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나갔다. 관성이라는 게 참 무서워서, 이대로 침대에서 오늘 할 일을 찾다가는 정말 침대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숙소는 스린 역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비는 여전히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잠시 멍하니 길거리를 바라봤다. 스린 역 앞은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사람들이 오고 다니고 있었다. 그중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한 포장마차였다.


 진짜 웃긴 이야기지만 그 치열함에 눈이 갔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포장마차에서 묵묵히 무언가를 구우며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 그 치열한 모습에 끌려 내 발걸음은 포장마차 앞으로 향했고, 손은 지갑으로 향했으며, 결국 대만식 피자로 아점을 해결했다.


다음 날에도 먹게 된 나의 사랑, 대만식 피자


 맛은 대만족이었다. 그냥 밀가루 덩어리에 여러 야채를 담은 게 다인데 어쩜 이렇게 맛있는지. 아프고 난 직후에 먹어서 그런 건지, 비가 오는 운치 있는 분위기 속에서 먹어서 그런 건지. 여담이지만 결국 난 마지막 날까지 아침을 이 대만식 피자로 해결했다. 그만큼 중독성 있고 일상적인 맛이었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아침밥처럼 말이다.


 본격적으로 배에 음식이 들어가자 힘이 솟아났다. 비가 오는 것 따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비를 온몸에 뒤집어쓰고서라도 타이베이를 돌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진짜 그러지는 않겠지만). 다음 행선지는 보안궁이라는 곳이었다. 도교 사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곳이었다. 그저 건물이 꽤 이쁘장하다길래 갔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비 오는 날 타이베이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숙소 스린이랑 가까운 곳을 택했을 뿐이다. 


비 와서 그런지 나름 운치 있다


 보안궁 내부는 마치 삼국지에서나 등장할법한 중국식 정원이 펼쳐져있었다. 한국의 정원과 비슷한 모습도 있었지만, 묘하게 중화 색채를 띠는 요소들이 더러 보였다. 대만의 정체성을 두고 외국인인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뿌리만큼은 확실히 비슷한 문화권이라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누가봐도 중국식 구조물이라는 게 느껴지는,,,


 보안궁을 다 돌고 나니 할 게 없어졌다. 할 게 없다기보다는 준비된 게 없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잠시 비 오는 거리를 바라보며 네이버에 '타이베이 행사'를 찾아봤다. 스펀의 천등 축제 역시 이런 행사들 때문에 왔으니, 혹여나 타이베이에서 하는 다른 행사가 있으면 방문해볼 심산이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인지. 내 눈길을 확 잡아끄는 행사가 떡하니 검색창 첫 페이지에 나왔다. 바로 '원피스 박람회'였다. 


 원피스는 나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일본 만화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던 만화였다. 솔직히 과장 안 하고 만화를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원피스라는 만화를 알만큼 인지도가 높은 축에 속한다. 나는 심지어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에 속했다. 그저 동네 규모 수준의 박람회도 아니었고, 월드 투어를 하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원피스 박람회가 타이베이 시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비 오는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문화생활은 바로 전시 관람 아니겠는가.


상남자 상디가 그려진 입장표


 지금은 당연히 알지만, 대만은 서브컬처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은 편이고 그렇기에 대만에서는 이와 관련된 큰 행사가 자주 진행되는 편이다. 만화 역시 그중 하나에 포함됐다. 이 전시는 원피스 발매 15주년을 기념하여 진행되는 박람회였다.


주인공 루피를 지나서


박람회를 안내하시던 안내원의 반강제 사진 샷


원피스 팬이라면 누구나 로망을 가졌을법한 고잉 메리호의 식탁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거짓말 안 치고 박람회 안에 아는 것들만 100%다 보니, 몰입감이 엄청났다. 여행하며 돌아봤던 각종 박물관이나 미술 전시회를 떠올려본다. 만약 그 안에 있는 작품들을 모두 안다면, 평소보다 훨씬 더 몰입감 있게 그 전시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역시 만고 불면의 진리인가 보다.


 한 시간 조금 넘게 박람회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배가 다 꺼졌다. 비가 와서 습해서 그랬던 걸까. 평소보다 피로함 역시 빨리 찾아오는 듯했다. 아마 몸살 걸린 채로 하루 종일 걸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이럴 때는 쉬어줘야 한다. 괜히 더 움직여봤자 내일 아침에 또 아플 게 뻔했다. 마지막 날을 그렇게 장식하기는 싫었다. 일단 어디 앉아서 배를 채워야 했기에 주변을 둘러봤고, 그중 내 눈길을 강하게 이끄는 간판이 있었다. '부두 도넛'. 


 이름이 전혀 매치가 안 된다. 부두라는 단어는 어쩐지 주술적인 이미지를 풀풀 풍기는 단어다. 거기에 도넛? 심각하게 미스매치인 단어들이다. 하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더 끌렸고, 타이베이시를 잘 표현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옛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가 내가 생각하는 타이베이의 정체성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난 도넛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잊을 수 없는 맛과 비주얼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애초에 크림 파우더가 올라간 도넛, 그리고 걸쭉한 치즈와 소고기 패티의 조합이 실패할 수 있을까 싶다. 짭조름한 감자튀김 역시 일품이었다. 만약 한국에도 이 프랜차이즈가 있었다면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번은 꼭 먹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브랜드를 아는 사람도 극히 적었고, 한국에는 단 한 개의 지점도 없었다. 대만에는 왜 이렇게 수입하고 싶은 브랜드가 많은지 모르겠다. 아종면선 곱창 국수, 닭날개 볶음밥, 부두 도넛 등등... 그렇게 고 칼리로의 음식을 섭취하고 나니 배가 다시 든든해졌다. 오늘 여행의 후반부를 향해 달려갈 시간이었다.



내리는 잔잔한 비처럼


 비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바닥에 부딪히며 거칠게 튀어 오르던 빗방울은 이제 부드럽게 땅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흐리던 하늘은 어느새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마치 온 세상에 수채색 필터가 먹여진 것만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짙은 녹색 나무들은 더욱 생기를 머금었다. 텁텁해 보이던 건물들은 조금 더 유해진 느낌이었다. 비가 내린 뒤의 타이베이는 더 상냥하고 차분해진 분위기를 풍겼다. 


 이 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해 나 역시 차분한 관광지를 목표로 정했다. 바로 임가화원. 임 씨 가문의 사유지에 세운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한다. 특별할 것은 없지만, 정원이 수려하게 잘 꾸며져 있고 아름다웠기에 잠시 들러서 쉬는 시간을 갖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대만에서도 상당히 아름답고 잘 가꾸어진 정원 중에 하나라는 것 역시 매력적인 요소였다. 취두부의 역한 냄새가 만연한 푸종역 앞 거리를 한 10분 걸었을까, 임가화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채색 가득한 화원


 화원은 다른 곳보다 유달리 물기가 촉촉했다. 같은 붉은색이라도 물기를 머금어서 그런지 더욱 매혹적이었고, 비에 푹 젖은 녹음에서는 향기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식물들에서 나는 아찔한 향에 취해 화원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정통 중국풍의 정원 모양새가 상상력을 자극했다. 비가 와서 사람들 역시 별로 없었기에 정원 내부는 매우 조용했다. 고대 시절 중국, 높으신 분이 친우를 불러 조용히 걸으며 담소를 나누는 그런 풍경이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동안 초대받은 친우에 빙의하여 화원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다시 간다고 해도 비오는 날에 가고 싶은 임가화원


 구석에 있는 정자에 앉아 비 내리는 정원을 하염없이 바라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비 내리는 날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나름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여행마다 하루 정도는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날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시간 버리고 한 게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정작 본인은 매우 즐겁게 보내는 그런 날들이 있다.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행자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하루 종일 원피스 박람회와 정원 하나 둘러본 게 다인 날. 그렇지만 나에게는 이 날이 없었다면, 다음날 역시 없었을 게 뻔하다. 오늘의 충전이 있었기에 꽤나 강행군인 다음날의 일정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었다. 오히려 정자에 앉아서 다음날 뭘 할지 찾다 보니 시간도 금방 가고 계획도 세울 수 있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지는 2월이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마저 멈췄다. 평소 같으면 또다시 하나의 일정을 잡았을 것이다. 비도 그쳤고 이제 겨우 오후 5~6시인데 뭘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 종일 여유롭게 보내서 그런가, 관성 때문에 쉬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리고 다 나았다고는 하지만 오전에 몸살 났던 몸이다. 괜히 또 무리하다가 내일도 몸살로 하루를 열고 싶지 않았다. 일찍 숙소에 들어가기 위해 정원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길가에서 진행 중이던 넷마블의 '모두의 마블' 행사. 지금은 내가 이 회사의 직원이라니,,,


 지하철을 타고 다시 스린 역으로 가던 중. 원산역 부근을 지날 때 엄청난 것을 발견했다. 원산역 인근은 지하철이 지상으로 다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 내 눈에 놀이공원처럼 밝게 빛나는 공간이 보였다. 나는 고민 없이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려 그곳을 향해 걸었다. 알고 보니 오늘 아침에 들렀던 보안궁 바로 반대편에 있는 곳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뭐하는 곳인지는 몰랐으나, 꽤 넓은 공간이 빛나는 등불로 도배되어 있었다.


놀이동산에 온 줄 알았다
실제로 보면 한강 공원 뺨치는 넓이다


 나중에 원산역 등불축제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일회성 행사였던 것 같다. 내가 방문한 시기가 기가 막힐 정도로 타이밍이 좋았던 거였다. 우연찮게 발견하는 것들은 평소보다 조금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심지어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들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입을 떡 벌리고 이 근처를 한 바퀴 다 돌았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진짜 별 거 없는데, 반짝이는 걸 보면 좋아하는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루의 마무리가 더욱 풍성해졌다. 스펀에서 날린 등불과는 조금 다른 등불이었지만, 여전히 등불은 나를 대만으로 이끌어주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존재다. 


 예상치 못했던 설렘을 마주했기 때문일까? 갑자기 배고 고파졌다. 원래는 바로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한 끼 정도는 먹고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기억에 남는 곳은 아니었나 보다. 왜냐하면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진을 검색하다가, 기억에 없는 이 우육면 사진을 보고서야 내가 저녁을 먹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국물이 진한 우육면


 하루를 마무리하며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하던 여행 중 몸살이 난다는 건 지금 상상해도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그날 비까지 하루 종일 내려댄다니, 아마 최악의 여행으로 기억될 여행일 게 뻔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그런 상황에서 매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봐도 그날의 내가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고 자부한다. 임가화원의 정자에 앉아서 찬찬히 고민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걸까. 뭐 그것도 맞다. 마침 정했던 관광지들이 비 오는 날에 특화된 장소들이었으니 말이다. 


 제일 중요한 건 행동했다는 사실 아닐까 싶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몸살이 나는 상황에 그 누가 나가서 여행 다닐 생각을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일어났다. 조금은 잤지만 그래도 일어나서 몸을 움직였다. (물론 아플 때 일어나서 움직이는 게 권장되는 행동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랬기에 좋아하는 만화 박람회도 가고, 도넛 버거도 먹고, 임가화원도 구경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등불축제에 따뜻한 우육면까지 먹을 수 있었다. 


 결국 행동해야 행운이든 보물이든 따라온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 하루였다. 정말이지, 단순한 여행 하루에 인생의 진리를 갖다 붙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로만 들어오던 명언을 삶으로 직접 증명했을 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진지하게, 비 오는 여행지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면 이 정도 자부심은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자신 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었다. 나는 비 오는 타이베이의 비 오는 하루를 매우 알차게 보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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