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멜버른 2019 (2)
멜버른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다. 부정할 수가 없을 정도로 멜버른에서 가장 인기 있고, 멜버른을 대표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곳이다. 이 투어는 끝나는 장소와 시간이 칼같이 맞아떨어져야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시작 시간 역시 한 치의 오차가 없어야 했다. 그래서 여행 역사상 처음으로 아침을 거르고 시작한 투어이기도 하다. (그냥 내가 늦잠 잤다)
본격적인 투어 이야기를 하기 전 사설을 하나 풀자면, 여태까지 여행 다닌 곳 중에서 호주만큼 인터넷이 잘 터지는 나라는 없었다. 한국은 IT 소비 강국이다. 그렇기에 외국의 인터넷 속도는 항상 한국보다 현저히 느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한국보다 느린 건 맞지만 호주는 절대로 '느리다고' 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솔직히 사는데 전혀 불편함을 못 느낄 정도로 빠른 인터넷 속도 덕분에 길 찾기나 정보 검색을 손쉽게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지금 흔히 쓰는 '구글 맵'을 처음으로 만든 곳이 호주라고 한다. 호주에서 만든 지도 프로그램을 구글이 인수해서 '구글 맵'으로 개선시킨 것이다. 그만큼 IT에 있어서 이미 상당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그에 따라 환경 역시 잘 갖춰진 나라였다. 괜히 살기 좋은 나라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게 아닐 것이다.
아무튼 작고 하얀 버스에 열명 조금 넘는 인원이 타서 투어를 시작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란 직역해서 그대로 '큰 바닷길'을 구경하는 투어다. 이름이 너무 멋이 없었지만, 그레이트라는 단어만큼 이 공간을 잘 설명하는 곳이 없을 것이다. 길이가 무려 243km에 달하는 바닷길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325km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길이의 해안 드라이브 코스다. 이 길이 단순히 '그냥 길'인 것이 아니라 아주 잘 가꾸고 만들어진 길이라는 걸 볼 때, 아마 세상에서 가장 긴 해안길이 아닐까 싶다.
이게 말로만 들으면 243km 길이의 해안길을 달리며 창밖을 구경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긴 바닷길 중간중간에 즐길거리가 너무 많다. 왜 하루를 꼬박 쏟아부어야 이 투어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건지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유희가 넘쳐난다. 그 유희 중 첫 번째는 입이 즐거운 '그레이트 오션 로드 초콜릿 팩토리'다. (Great Ocean Road Chocolatier)
처음에는 역시나 '아 투어 시간 채우기용 공간이구나' 싶었지만, 들어가는 순간 그런 생각은 날아가버렸다. 나는 초콜릿을 사랑한다. 정말 몇 킬로그램이나 되는 양을 던져주고 억지로 먹으라고 해도 잘 먹을 자신이 있다. 런던에서 엠엔엠 월드를 보고 경악했던 나를 안다면, 내가 얼마나 초콜릿에 진심이지 알 것이다. 그런 내 앞에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초콜릿 상품들이 펼쳐져 있었다. 각기 다른 재료, 다른 공법으로 만든 수십 가지의 초콜릿들이 그 광채를 뽐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호주에서 초콜릿이 가지는 위상이 생각 이상으로 컸다. 그렇기에 이곳은 여행자들이 충분히 방문할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였다.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옷 몇 벌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처럼 신중하게 공장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아침마저 거른 상태였기 때문에 초콜릿을 향한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했다. 결국 두 손 가득 초콜릿을 사서 버스로 돌아왔다. 가이드분이 날 보며 '그거 설마 다 드시려고 사 온 건 아니죠?'라고 장난치실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물론 이 중에 선물용 초콜릿도 있었지만 반 이상은 내가 먹으려고 사 온 거라 흠칫했다. '에이 당연하죠'라고 무마하며 황급히 버스 안 자리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는 케넷 리버라는 곳이었다. 사실 투어 당시에는 이 장소의 초입만을 빠르게 보고 지나쳤다. 왜냐하면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는 꼭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마무리해야 제대로 끝을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케넷 리버라는 곳은 야생 코알라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20분 정도의 시간이 허락됐고, 코알라가 평소처럼만 출몰한다면 충분히 얼굴 정도는 보고 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 동안 다른 녀석들에게 신경을 뺏겨서 코알라를 코빼기도 못 봤다.
사실 앵무새들을 보려고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간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코알라를 보러 가기 위해 걷고 있었는데, 어깨에 이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솔직히 처음에는 기겁했다. 주황색과 초록색 깃털 수북한 존재가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신나는 감정이 모든 걸 압도했다. 한 번도 이런 특이한 동물과 신체적으로 접촉해본 적이 없다. 동물원에서 감상만 하는 관계로만 알아왔던 앵무새였다. 하지만 이런 앵무새들이 내게 전혀 적의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나에게 다가오니 황송한 생각마저 들었다. 옛 호주 지역에서 앵무새를 데리고 다니던 해적이 된 기분이었다.
곧바로 근처에서 앵무새 모이를 사서 이 친구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청난 교감을 했다. 이름까지 붙여줬다. 찰리와 브라운. 남들이 다 코알라를 보러 다닐 때, 나는 찰리와 브라운을 데리고 모이를 주며 케넷 리버 초입을 돌아다녔다. 난 정말 동물을 좋아하나 보다. 집에서 키우는 막내 포메라니안 친구들에게 뭔가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찰리와 브라운이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 시간이 더 지속됐으면 하고 바랬지만, 가이드분이 일행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이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했다.
새삼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악질적이지 않고 잘 대해줬으면, 이렇게 많은 새들이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먼저 다가올까. 수많은 여행객들 역시 여행에 와서는 '보통은' 그 나라의 룰을 따른다. 그렇게 형성된 문화가 있기에, 다양한 인종과 나라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와도 이 동물들의 행동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호주는 사람만이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동물들도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된다. 외국에서 살게 된다면 무조건 호주라고 결심하게 되는 큰 계기기도 했다.
다음 목적지는 아폴로 베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딱히 뭘 보러 가는 곳은 아니었다. 사실 여태까지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애피타이저 같은 느낌이었고, 아폴로 베이를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이 바닷길에 산재한 아름답고 장대한 자연물들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남들이 다 피시 앤 칩스가 맛없다고 할 때, 혼자서 맛있다고 외치는 사람이다. 영국에서도 하루에 한 끼는 무조건 피시 앤 칩스로 해결했고, 영국의 자식 나라 뻘인 호주에 와서 그 음식을 안 먹을 수가 없었다. 마침 아폴로 베이에서 가장 괜찮다는 음식점에 피시 앤 칩스가 있길래, 신나서 그 메뉴를 시키고 영국의 향수를 잠시 즐겼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지만, 그 구성 요소들을 보며 인위적이라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바다가 만들어낸 자연 중에서 가장 장대하고 아름다운 장소를 뽑으라면 지체 없이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말할 것이다. 솔직히 리뷰만 봤을 때는 그저 바닷길에서 주상 절리들을 보는 느낌이기에 제주도랑 별 차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평범하고 익숙한 것이라도 그 스케일이 수십 배로 커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거대한 것을 동경하고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자연물들은 바다가 만들어낸 장엄함 그 자체였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뷰 포인트는 총 네 가지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로크 아드 고지(Loch Ard Gorge)라는 곳이다. 영국의 로크 아드 호라는 배가 난파한 곳이라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에는 탐과 에바라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얽혀있다. 역시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지면 몰입감이 배가 된다. 그저 눈으로만 봐도 아름다운 광경에 사랑 이야기가 더해지니 이 장소가 더더욱 찬란하게 보였다.
두 번째는 12 사도 바위다. 길게 늘어져 있는 절벽 사이사이로 거대한 암석 12개가 돋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특별히 헬기 투어를 할 수 있다. 투어라고 하기에는 그저 30분 정도를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이 지역을 돌아보는 것이다. 12 사도 바위 전체의 길이가 어마어마해서 두 눈으로는 한 번에 담기도 어렵기에 생겨난 투어다. 헬기를 타는 것이기 때문에 가격이 조금 나가지만, 언제 이럼 경험을 해보냐는 생각에 한치의 고민도 없이 헬기 탑승을 신청했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12 사도 전체의 크기가 엄청나다. 한눈에 담으려면 상공에서 바라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새삼 이곳이 얼마나 거대한 길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여태까지 겪어봤던 바닷가는 대부분 해수욕장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이 한국이든 외국이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륙에 몰아치는 바다'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영국의 세븐 시스터즈 힐이 첫 번째였지만 그때는 이렇게 압도되는 장엄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지금은 정말 말 그대로 거대한 바다가 거대한 대륙에 몰아친다는 느낌이 피부로 와닿았다. 심지어 저 멀리 보이는 바다 끝에 남극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이 감동을 배가 되게 했던 것 같다.
정말이지, 나의 세상은 너무 작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속한 세상이 새삼 얼마나 볼품없이 작은 공간들인지 돌아보게 된다.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먼지 같은 존재인지 말이다. 그래서 이런 공간에 올 때마다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생긴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더 탐험하고 싶다. 저 거대한 미지의 공간들을 끝없이 탐험하고 싶다. 수 억 개의 별이 펼쳐진 우주를 손안에 넣고 싶었던 아나킨 스카이워커처럼, 이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장소를 내 눈 안에 담고 싶다. 그런 갈망이 피어나게 된다. 그게 아마 내 평생의 숙제 아닐까.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여행하며 살 것이다. 불분명한 미래 가운데서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하게 된다.
세 번째 뷰 포인트는 그로토라는 곳이다. 그로토(Grotto)는 작은 동굴이라는 뜻이다. 사실 그렇게 대중적으로 쓰이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난 이 단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서양권에서 산 경험이 있어서? 그것보다도 재밌게 읽었던 소설책 덕분이다. 한 때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시리즈를 사랑했었다. 그중에서 12편의 제목이 'Grim Grotto'다. 당시 익숙하지 않았던 단어라 직접 검색해본 적이 있고, 이 단어가 작은 동굴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는 막연히 동굴이라고만 생각하고 이런 지형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그로토를 보며 '아 이게 그로토구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단어를 처음 접할 때, 단어를 수식하던 형용사가 grim(암울한)이라는 뜻이라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이 지형 자체가 되게 우울해 보였다. 거대한 자연 안에 숨겨져 있는 작고 어두운 공간. 사진을 찍기 위해 북적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공간 자체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귀를 막고 시선을 그로토에만 돌린다면,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고도 외로운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이곳에 홀로 버려져있던 동굴의 감정이 전해져 온다. 사람들의 손을 타면서 당연히 훼손이 일어나지만, 어쩌면 외로움은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그로토는 외롭고 온전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할까, 아니면 조금은 닳더라도 외롭지 않은 지금에 만족할까? 답이 없는 고민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뷰 포인트는 바로 선셋이다. 내가 이 글 처음부터 지겹도록 한 말이 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는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바로 이 선셋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 투어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이 맑은 날을 골라, 노을이 지는 시간을 계산해서 역순으로 코스와 시간을 짠다. 그게 이 투어의 기획 방향이다. 그렇기에 이 장소와 시간을 놓친다면 투어의 정체성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일몰 15분 전부터 노을을 볼 수 있는 장소로 가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11월의 호주가 여름 날씨라지만, 저녁 시간에 이렇게 거대한 바다 앞에 있으면 여름이고 뭐고 없다. 그나마 챙겨 온 옷들 중에서 가장 두꺼웠던 후드티를 입고 가지 않았다면 얼어 죽을 뻔했다. 남극에서 바로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라 그런지 어쩐지 더 추운 느낌이기도 했다. 솔직히 노을만 아니었다면 당장 벤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심지어 당시의 스마트폰은 아이폰6라 추위 때문에 이미 배터리가 나간 상태였다. 그래도 어떻게 노을을 꼭 찍겠다고 건조해지다 못해 갈라진 손으로 카메를 들며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 속에서 건진 사진과 영상은 그 모든 아픔을 날려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노을이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세상 그 어디서도 이보다 거대한 노을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가득했다. 마치 세상의 끝자락에서 해가 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는 것 같았다. 아, 세상 어디서 이렇게 아름답고 장엄한 일몰을 볼 수 있을까. 마치 물로만 이루어진 우주 속 행성에서 태양이 지는 것을 바라보는, SF 영화 속 장면 안에 들어온 이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노을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는 이질적인 감상이었던 것 같다. 서글픔과 그리움보다는 위대함.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여행지 가서 노을을 보면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괜히 센치하고 슬퍼진다. 그런 감정보다는 이렇게 위대함 앞에 경건하고 겸손해지는 게 더 낫다. 물론 감정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매번 그렇게 센치해지는 것도 좀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리고 이건 행복에 겨워야 할 퇴사 여행이었다. 그랬기에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감정을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노을로 마무리한 하루로 기억될 2019년 11월 26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