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멜버른 2019 (1)
나는 어렸을 때 2년 조금 넘는 시간을 북미에서 보냈다. 그랬기에 서양 문화가 상당히 익숙하고, 서양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게 어색하지도 않다. 첫 여행지 역시 서양권인 유럽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2014년 이후 근 5년 동안은 단 한 번도 서양권을 방문해본 적이 없다. 여행에 필요한 여러 자원들 중에서도 시간이라는 자원이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내 여행은 동남아시아나 일본 등의 동양권 문화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오래간만에 서양 사람들 가득한 곳에 도착하니 살짝 떨떠름했던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멜버른 공항에 도착하고 난 뒤, 곧바로 숙소로 향했다. 뭐 서양권이 어색하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여기만큼 나한테 있어서 편한 곳이 없다. 무엇보다 의사소통이 한국 다음으로 가장 원활한 곳이기 때문이다. 영어는 원어민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였고, 거리에 보이는 모든 표시들이 이해가 가다 보니 어찌나 편하던지. 알아먹지도 못 할 언어들을 보며 유추하는 고생을 안 해도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물론 그걸 추리해나가며 알아내는 재미는 반감됐지만, 그 시간에 여행을 더욱 즐기는 게 훨씬 좋다.
아무튼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오른쪽 어깨에 미러리스 카메라를 동여매고 길을 나섰다. 첫 방문지는 멜버른에서 유명한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이었다. 이름에서부터 정겨움이 물씬 풍겨왔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호주 역시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유럽이 그 근원이 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캐나다나 미국의 여러 도시처럼 유럽에나 있을 법한 지명을 그대로 따온 경우가 많다. 빅토리아 역시 그중 일부였다. 이름에서부터 내가 서양권에 여행 왔다는 걸 곧바로 느끼게 해 줬다.
사실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은 조금 특별한 구조로 생긴 도서관이다. 미관상으로도 예쁜 곳이기에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공간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여행의 첫 목적지로서는 꽤 큰 역할을 한 장소였다.
방금 말했듯이 이름에서부터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거의 10년 이상 이전에 북미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줬다. 더 나아가 도서관의 생김새가 묘하게 캐나다 토론토의 도서관, 그리고 미국 보스턴의 대학 도서관들과 모습이 닮아있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 도서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어느 게 더 우위에 있다는 뜻 아니라, 그만큼 서양권에서 보낸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을 강하게 회상하게 하는 곳이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도서관을 한눈에 내려다보니 그제야 내가 서양권에 왔구나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거리에 가득한 서양 사람들과 간판보다도, 이런 추억 하나가 그 장소의 정체성을 정의한다는 게 참 신기한 일이다.
첫 여행지에서 감성을 물씬 받았으니, 이제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걸 할 차례였다. 바로 맛집 탐방이다. 이게 또 기가 막힌 게 메뉴가 버거였다. 완전 서양권에 여행 온 걸 제대로 즐기려나 보다. 여러 번의 검색 끝에 찾아냈다기에는 멜버른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 중에 하나였다. 바로 '화이트 모조'라는 식당이다.
아마 내가 살아오면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먹을 버거 중에서 가장 이름이 긴 버거일 것이다. 물론 내가 살면서 먹은 버거 중 가장 맛있는 버거 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한국식 버거와 미국식 버거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완벽한 버거라고 생각한다. 서양식 버거가 주는 극단적인 칼로리 비주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너무 짜지 않게 맛을 유지했고, 한국식 버거가 가지고 있는 미적인 아름다움과 균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물론, 내 주관적인 평이다. 사진을 찍어서 친구에게 보냈더니 그 친구는 '뒤틀린 황천의 버거' 같다며 질색했다. 뭐,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 이해해주기로 했다.
항상 여행 첫끼에서 쑥스러움을 느낀다. 정확히 말하면 혼자 하는 여행에서 말이다. 벌써 혼자서 해외여행 다닌 지 5년 차가 다 되어가지만, 혼자서 첫끼를 먹을 때의 그 어색함은 익숙해지질 않는다. 물론 한 2~3분 지나면 다 사라져 버리는 감정이지만,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나를 찾아온다는 것에 이제는 질림을 넘어서서 반갑기까지 한다. 여행의 시작을 울리는 종이랄까?
사실 혼자 먹는 건 전혀 안 어색한데, 혼자 맛집에 와서 사진을 찍는 건 아직도 조금 쑥스럽다. 맛집에는 항상 사람이 넘친다. 요즘은 감사하게도 1~2인용 테이블을 많이 구비한 식당들이 많지만, 여전히 4인용 테이블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식당이 많다. 그런 곳에서 한 명이 4인용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음식 사진을 찍는 모습이 민망하게 느껴진다. 엄연히 말해서 사람들은 타인한테 생각보다 관심이 없지만, 그저 나 혼자 이런 상황을 신경 쓰게 된다. 아마 이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감정을 딱히 숨기고 싶지 않다. 이 고비만 넘어가면 완전히 '혼자 여행하는 mode'로 탈바꿈되기 때문에 그저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만족스러운 한 끼를 먹고 나서는 당연히 디저트가 동반되어야 한다. 마침 길을 걷다가 추로스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먹고 싶은 게 보인다고 닥치는 대로 먹다 보면 원래 먹으려고 했던 걸 못 먹기 마련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건 일상 속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여행에만 가면 위장의 용량이 신기하게 2배로 불어난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여태까지 항상 그래 왔다. 그랬기에 눈앞에 놓인 추로스 카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비록 5~6시간 뒤에 캥거루 스테이크를 먹을 예정이었지만, 그전에 추로스 몇 개 먹는다고 대세가 달리질 리는 없었다. 그리고 외국에서 먹는 추로스의 맛도 매우 궁금했다.
역시 서양식 달달한 디저트는 달콤함을 때려 박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디저트에 달콤함이 들어가는 건 너무 당연하지만, 서양은 그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정교함보다는 무지막지함을 택한 것 같다. 추로스 위에 달콤한 크림, 사탕가루, 그리고 솜사탕 실을 얹어서 먹으니 달달함이 느껴지다 못해 입안에 아예 상주하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이 단맛을 상쇄시켜주는 음료가 아니라 더해주는 초코 셰이크까지 시키니 말 다했다. 이게 서양식 디저트지. 어린 시절, 미국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 박스에 초코 시럽을 잔뜩 뿌리고 콜라와 함께 먹던 그 추억을 상기시키는 맛이었다. 이제는 이 칼로리들을 소비하러 갈 차례였다.
바다라는 장소는 이상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그래서 여행지에 바다가 포함되어 있으면 누구든지 바다를 한 번씩을 방문하고는 한다. 아니려나? 아무튼 내가 느끼는 바다는 그렇다. 땅 옆에 붙어있는 거대한 물덩어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장소마다 각각 다른 매력을 지니는 신비한 존재들이다. 강릉 안목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 제주도 김녕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 지중해 니스에서 바라보는 바다 모두 제각각의 매력을 뽐낸다. 그렇기에 질리지 않는다.
나름 여행 밥 좀 먹어서 그런지 꽤 많은 종류에 해변을 봐왔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신선한 바다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위가 안 바뀌는 건 아닌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특정 항목 안에서 해변들의 순위가 시시각각 바뀌고는 한다. 멜버른 동남쪽에 있는 세인트 킬다 해변은 감성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여태 만난 해변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세인트 킬다 해변은 멜버른 시내 중심부에서 약 20분 정도 트램을 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접근성 측면에서 시민들과 여행객 모두에게 친절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도착했을 때의 감상은, 해변 치고는 내륙의 장소와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해변가는 마치 누군가가 '자 여기서부터가 해변 구역이야'라고 정해놓은 것처럼, 다른 지역으로 넘어간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준다. 하지만 세인트 킬다 해변은 근처 공원, 도로, 심지어 그 너머에 보이는 빌딩들마저도 하나의 완전체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일단 해변가에 항상 딸려오는 모래사장이 안 보인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전형적이지 않은 것을
마주치는 건, 심지어 그게 여행지라면 상당히 즐거워진다. 내 선택으로 인해 나 자신이 생소한 경험을 했다는 일종의 뿌듯함에서 오는 쾌락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갈매기들이 초록 벌판 위에서 끼룩끼룩 거리는 건 지금 당장 생각하기로는 처음 보는 광경인 것 같다. 자칫하면 흰 비둘기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면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특히 나처럼 상상력이 항상 흘러넘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킬다 해변의 작은 한 부분이 환상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 킬다 해변 자체가 나에게는 환상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심지어 날씨마저 완벽했다. 11월에 호주에 오기로 한 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걸 아주 당당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해변가에 늘어선 크고 작은 배들과 그 위로 웅장하게 펼쳐져있는 구름들이 참 잘 어울렸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멜버른 시내의 건물 숲들은 마치 도시 자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날씨는 따뜻했지만 바람은 선선했다. 한 마디로 완벽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세히 잘 살펴보니, 웬 패러글라이드 같은 것들이 바다 위를 날파리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거기에는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다. 말로만 듣던 카이트보드 액티비티를 멜버른에 와서 처음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미친 액티비티라고 생각했지만, 바다와 하늘을 자유롭게 활강하며 날아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에게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한 번쯤은 이런 도전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밑에는 바다라서 크게 안 다칠 거 같은데 해봐도 좋지 않을까? 자유롭게 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행복과 만족감이 가득했다. 이제 막 퇴사를 마친 내가 가장 짓고 싶은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저 액티비티를 하지 않더라도,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다시 저런 밝은 얼굴로 돌아올 거라고 한껏 기대를 품게 해 줬다.
해변을 걸으며 구경을 하니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하늘의 색변화가 매우 뚜렷하게 일어났던 날이었다. 높이 떠 있던 구름 역시 점점 지면을 향해 낮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바람 역시 점점 거세졌다. 분명 이십도 후반대 날씨였던 게 체감상 십도 이하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슬슬 들어갈 시간이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문득 비슷하게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추억이 가득한 모모치 해변이었다. 그곳 역시 모래사장보다는 초록 잔디가 더 인상에 남는 곳이다. 이상하게 이런 해변들이 감성을 잘 자극하는 것 같다. 모래로 가득한 해변은 신나게 놀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반해, 이런 곳은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감성을 풍겨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떠나가는 발걸음 역시 느릿느릿해진다.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대망의 캥거루 스테이크가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저무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도심으로 돌아가는 트램에 올라탔다.
호주에 오면 꼭 먹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캥거루 스테이크다. 솔직히 단어에서 주는 불쾌함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그 어여쁘고 귀여운 캥거루를 요리해 먹는다니 끔찍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 가서 '캥거루 스테이크'라는 걸 먹어보겠나. 잔인하다고 먹지 않으면 스위스에서 먹은 송아지 스테이크는 무슨 죄란 말인가. 공평하게 캥거루 스테이크도 먹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해당 여행지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을 더 이상 놓치기 싫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태어나서 스테이크를 많이 먹어봤지만, 맛은 제쳐두고 이렇게 식감이 쫄깃한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함께 나온 소스, 브로콜리, 그리고 매시드 캐럿 역시 풍미를 더해줬다. 특히 다진 당근이 이렇게나 맛있을 줄은 몰랐다. 매시드 감자와 고구마는 많이 먹어봤지만, 당근은 거의 소스처럼 연하게 다져 나와서 캥거루 스테이크를 더욱 빛내줬다. 가격은 조금 나갔지만, 퇴사 뒤 여행인데 그게 무슨 걱정이랴.
항상 그랬지만, 이번 여행 역시 예감이 좋았다. 특히 먹을 것에 있어서는 여태 있었던 그 어떤 여행보다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것 같았다. 모든 여행이 항상 이렇게 행복한지, 내 여행에 특별한 축복이 깃든 건지 고민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기분 좋은 멜버른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아, 정말 퇴사하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