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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May 24. 2021

멜버른 동심 여행

#3. 멜버른 2019 (3)


칙칙폭폭 산속 마을


 나는 보통 흰쌀밥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그 외의 음식으로 아침을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로 밥에 길들여진 입이다. 그런 내가 당과 밀가루 가득한 도넛과 커피로 하루를 연다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멜버른 3일 차 아침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도넛 맛집으로 유명한 '쇼트 스탑 커피 앤 도넛(Shortstop Coffee & Donuts)'에서 푸짐하게 아침을 먹었다. 사실 보통 같았으면 식사를 한 뒤 디저트로 먹었겠지만, 오늘 정오부터 또 투어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이 맛집을 아침으로 대신했다. 멜버른 일정은 시내보다는 근교에서 더 많은 시간을 차지했기에 일정만 따라가다가는 시내에 있는 맛집들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의 플레인과 쿠키 앤 크럼블 도넛


 시간은 일부러 10시에서 11시 언저리로 잡아서 갔다. 도넛 가게에는 안에서 먹는 사람보다 테이크 아웃으로 해가는 사람이 훨씬 많다. 출근 시간대에 그 복잡한 상황에서 테이블을 잡고 밥을 먹기란 상당히 불편할 터였다. 내 예상이 적중했다. 상당히 유명한 맛집임에도 불구하고 10시에서 11시 사이에는 꽤 한산했다. 구석 테이블에 신문지를 펴고 커피를 마시는 노신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반대쪽 구석에서 도넛 두 개와 플랫화이트를 시킨 뒤, 다음 날 시드니로 넘어갈 일정을 검토했다.


 도넛을 다 먹고 볼 일을 보자 한 시간 가량 지나고 거의 12시가 다 됐다. 오늘의 투어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벤을 타고 시작한다. 가볍게 약속 장소로 걸어갔고 제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의 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퍼핑 빌리와 펭귄 아일랜드다. 퍼핑 빌리는 산속에 깔린 옛 기찻길을 석탄 연료로 움직이는 증기 기관차로 누비는 여행이다. 우리는 기차를 타기 위해 단데농이라는 마을로 향했다.


이른 오후의 단데농 마을


 산속에 있는 평화로운 마을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사실 이 마을은 증기 기관차를 타기 위한 교두보 같은 곳이라, 짧은 시간 동안 마을을 잠시 둘러보기만 하고 기찻길로 향했다. 가면서 가이드분이 호주의 인종 차별 역사에 관련된 지식들을 풀어주셨는데, 그게 꽤 재밌어서 몰입해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출발 시작 전에 슬슬 예열을 해두는 증기 기관차


 새삼 느끼는 거지만 투어를 신청하는 게 확실히 몸과 마음이 편한 것 같다. 혼자 왔다면 가격적인 측면에서는 조금 경제적일 수 있었겠지만, 단데농까지 오고 거기서 증기 기관차 타는 곳까지 오고 하는 과정이 너무 복잡했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투어가 훨씬 더 경제적이었다. 


 열차가 출발하기 약 10분 전, 예상하지 못했던 향수가 찾아왔다. 지금이야 기차를 떠올리면 다들 KTX라 SRT를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무궁화호가 기차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어린 내 손을 잡고 무궁화호에 오르던 부모님의 손길이 기억났다.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뒤에도 종종 기차에 탔다. 그 시간 속에는 항상 막연한 설렘이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곳으로 출발한다는 기대감은 플랫폼에 도착하면 극대화되고는 했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기차에서 까먹을 귤과 계란을 생각하면 군침이 돌고는 했었다. 통로에 음식을 파는 분들이 지나가기만을 눈이 빠질 새라 기다리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탈 증기 기관차는 내 추억에 존재하는 기차와는 사뭇 다를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레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상이 좋아져서 세련되고 깔끔한 기차가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투박하고도 연기 자욱한 기차가 주는 감성은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 언젠가 증기 기관차가 세상에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는 추억 속으로 사라질 감성이다. 당장 나만 해도 지금 무궁화호를 타라고 하면 절대 안 탈 것이다. 시간에 쫓겨 사는 한국인들에게 굳이 KTX를 놔두고 무궁화호를 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선택이다. 그래서 잊고 지냈던 그 그리운 감성들을 바다 먼 이곳에서 되찾은 것이다.


산속을 누비는 증기 기관차


 어릴 때 좋아하던 만화 중 하나가 '꼬마 기관차 토마스'다. 푸르디푸른 산속을 누비니 내가 마치 그 만화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녹음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울창한 숲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그런 숲을 귀여운 증기 기관차로 달리니 기분이 째질 듯했다. 어렸을 때는 꽤 자주 쓰던 단어인 '칙칙폭폭'을 직접 들은 게 얼마만인지. 가끔씩 울리는 경적 소리와 증기 기관의 힘으로 힘차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가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장대한 교향곡을 듣는 기분이었다. 여러 개의 소리들이 하나가 되어 이 푸르고 아름다운 공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동심으로 돌아갔던 이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미 목적지가 어디고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에 잠시 지워뒀었다. 아무 정보도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그런 기분이랄까. 신비한 힘으로 움직이는 기차로 환상의 산을 넘어가면 그 뒤에는 무지갯빛 성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꿈같은 시간이었다. 기차 안에 다양한 인종과 폭넓은 나이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두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분명 그랬다고 믿는다. 얼굴에서 보이는 그 천진난만한 표정들을 잊을 수 없다. 그 표정들은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펭귄들의 섬


 다음 일정은 단데농에서 꽤 긴 거리를 달려야만 하는 곳이었다. 필립 아일랜드, 차로 거의 2~3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이다. 이곳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펭귄 아일랜드. 바로 펭귄을 보러 가는 날이다. 펭귄이야 그냥 동물원에서 보면 그만이지 않냐는 말을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필립 아일랜드에서는 펭귄들의 퍼레이드를 볼 수 있다. 그것도 우리가 흔히 매체에서 보는 거대한 펭귄이 아니라 과장을 조금 보태서 손바닥만 한 펭귄들이다. 그 앙증맞은 녀석들 수십 마리가 행진하는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심장이 아플지 상상이 되지 않는가?


 역시 베테랑 여행사답게 이동하는 2~3시간을 그저 이동으로만 채우지 않았다. 중간에 동물 농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30분가량을 쉬다가 간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호주에 서식하는 여러 동물들을 보고 직접 만질 수도 있다. 필수 코스는 아니었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만 차에서 내려 농장 안에 들어가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었다. 이런 곳을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전날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에서 찰리와 브라운 앵무새들을 만난 후라 이런 만남을 더욱 고대하고 있었다. 


우리의 권투 꿈나무 맥스와 알렉스


 이곳에서 처음으로 캥거루와 왈라비의 차이점을 알게 됐다. 우리가 흔히 권투왕으로 알고 있는 거대하고 근육질인 친구들이 캥거루고, 아담하고 귀여운 모습을 한 친구들이 왈라비다. 이 차이를 모르면 보통 왈라비를 보고 애기 캥거루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렇게 토막 상식,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짧은 교감을 한 뒤 다시 필립 아일랜드로 향했다.


마침내 도착한 필립 아일랜드


 도착했을 때 날씨가 너무 완벽했다. 적당히 시원한 바닷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섬 전체를 환하게 채우고 있었다. 은파에 비친 햇살이 거울처럼 반짝거렸다. 마치 섬 전체가 몽환의 세계가 된 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펭귄 퍼레이드를 볼 수 있는 해안가는 시간이 다 되어야 입장할 수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섬 전체를 둘러보며 펭귄들이 서식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여기서 펭귄 퍼레이드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이 것은 인위적인 행진이 아니다. 먹이를 구하러 나갔던 펭귄들이 밤이 되어서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이 마치 행진 같아서 퍼레이드라 이름 불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섬 곳곳을 잘 찾아보면 펭귄들이 서식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집에 남아있는 펭귄들도 볼 수 있었다.


너는 왜 안 나가고 거기 있니?


나름 이 여행에서 맛들린 사진 구도


 공간의 상대적 위치는 우리가 그 공간을 이해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필립 아일랜드는 그저 호주 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일 뿐이다. 멜버른 동남쪽에 있는 펭귄 서식지일 뿐이다. 하지만 이 섬이 남극에서 쭉 올라오면 있는 섬이라고 인지한다면, 그 사실이 우리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달라진다. 마침 이곳은 펭귄 서식지다. 키워드들을 조합해보면 어렴풋한 이미지가 잡히지 않나? 펭귄, 남극, 그리고 빛나는 섬. 아무리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더라도 이 세 가지 단어를 조합하면 환상의 섬 하나가 뚝딱 그려질 것이다. 나는 지금 그런 공간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내 마음을 미칠 듯이 흥분되게 만들었다. 빨리 해가 지고 펭귄들이 거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오늘의 저녁, 연어 스테이크


 물론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지금 뭘 먹어두지 않으면 멜버른에 도착하는 밤 11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건물 안에 있는 식당에서 연어 스테이크를 시켜 먹었다. 사실 이런 곳에서 먹는 음식은 가격만 비싸고 맛은 별로일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시킨 건데, 생각 이상으로 맛있어서 놀랐다.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채소를 잘게 으깨서 만든 것 같은 저 붉은 소스가 연어랑 찰떡궁합이었다. 첫날에 캥거루 스테이크와 먹은 당근 소스를 비롯해, 호주에서는 매시드 채소 소스를 참 잘 만드는 것 같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나자 펭귄 퍼레이드가 곧 시작한다고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펭귄 퍼레이드 때 관광객들이 꼭 지켜야 하지만, 지키는 사람이 많이 없는 룰이 있다. 바로 사진 촬영 금지다. 펭귄들은 그들의 신경에 저장된 정보와 시각적 요소를 조합해서 집을 찾아간다.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신기한 일이다. 섬에서 기어 나와 바다 한복판으로 나가 십수 시간을 사냥한다. 그리고는 해가 지고 나서야 다시 해안가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만 해도 엄청 대단한 것이다. 아무리 살던 곳이라고 해도 정확한 해안가로 수십 마리의 펭귄들이 오차 없이 같은 시간이 찾아오는 것은 어렵다.


 당장 우리 인간만 하더라도 해안가에서 출발해 십수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다가 다시 돌아오라고 하면, 당장 방향부터 못 찾아서 기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펭귄들은 그 어떤 기계의 도움도 없이 자신들이 떠나온 해안가를 정확히 찾아온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매일매일 같은 경로로 행진하며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즉, 그들의 몸 안에 매우 정교한 내비게이션이 탑재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카메라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카메라에서 터지는 플래시와 방출되는 빛은 이들의 시신경에 악영향을 준다. 호들갑 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까도 얘기했듯 이들의 크기는 끽해야 우리 종아리보다 작다. 그런 존재들에게는 작은 빛줄기마저도 큰 자극이 된다. 만약 시신경에 자극이 간다면 이들의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영영 자신들의 집으로 못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잠시 카메라를 드는 것이 이 펭귄들에게는 집을 잃게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몰래라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으려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물론, 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몰래 촬영을 해대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펭귄 퍼레이드가 끝난 후의 필립 아일랜드


 정말 태어나서 가장 심장이 귀여움 때문에 두근거린 적이 있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순간을 뽑을 것이다. 우리 집 막내들인 포메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태생적 한계라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 크게는 종아리, 작게는 손바닥만 한 펭귄들이 떼를 지어 일렬로 행진하는 장면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에버랜드와 롯데월드에서 보는 퍼레이드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아니, 이 현상에 퍼레이드라고 최초로 이름을 붙인 사람에게 큰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귀향길'이라는 이름이랑 '퍼레이드'가 주는 어감 자체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작고 앙증맞은 펭귄들이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퍼핑 빌리에 이어서 두 번째로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함께 온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로 통일되는 마법 같은 순간. 그래서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하늘과 달이 유난히 마법 같아 보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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