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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Sep 22. 2021

아침은 멜버른에서, 밤은 시드니에서

#4. 멜버른 ~ 시드니 2019


짧은 휴식


 마지막으로 글을 쓴 지 벌써 5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눈뜰 새 없이 바쁘던 일정이 잠시 마무리되고, 이제 다시 쉼을 가지려는 순간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던 호주에서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미완성된 글이라서 떠올랐던 건 아니다. 지금 내가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는 것처럼, 다음에 써야 할 글 역시 쉼에 관련된 글이었기 때문이다. 일이나 여행이나 오래 하다 보면 고된 건 매한가지. 배부른 소리 같지만, 여행으로 잠시 지친 몸을 풀어주던 그날을 돌이켜본다.


 이날은 오후에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가 잡혀있는 날이었다. 그랬기에 멜버른에서 투어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날에는 멜버른에서 딱 한 가지만 하고 가자고 마음먹었다. 험블 레이스라는 브런치 맛집에서 밥을 먹는 것이었다. 오픈이 몇 시였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11시에 가면 충분히 먹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호텔에서 10시까지 늑장을 부렸던 것 같다. 


 멜버른에서의 나흘을 책임져준 고마운 호텔을 떠난 뒤 험블 레이스로 향했다. 이제는 제법 이 근방의 길이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근 사흘 동안 가까운 거리는 일부러 발로 걸었다. 트램으로 충분히 갈 수 있는 곳도 20분 이상 걸리지 않는 이상 무조건 걸었다. 여행에서 내가 오랜 시간 동안 고수하는 일종의 고집이다. 그 지역을 발로 걸어야 진짜 내 것이 된다는 하나의 미신일지도? 물론 반은 일리 있고 반은 말도 안 된다는 소리인 걸 나도 안다. 다만 첫 해외여행을 거의 발로 뛴 나였기에, 그 시절의 좋은 기억들이 다음 여행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무더우면서도 상쾌한 멜버른의 거리를 거닐다 보니 어느새 험블 레이스에 도착했다. 11시라는 시간을 택한 건 정말 좋은 판단력이었다. 여태까지 멜버른의 유명 맛집에서 줄을 안 선 적이 거의 없는데, 곧바로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문을 받는 분은 매우 잘생기신 한국인 남성분이었다. 나랑 또래로 보였다. 그분의 강력한 추천으로 게살 칠리 스크램블과 크루아상을 시켰다. 딱 이름만 들어봐도 절대로 실패할 수가 없는 메뉴이지 않나?


게살 칠리 스크램블 크루아상


 자칫하면 느끼할 수 있고,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게살과 스크램블의 조화를 살짝 가해진 칠리 맛이 잡아줬다. 사실 크루아상을 딱히 엄청 좋아하지는 않는다. 아니 빵 자체를 달달한 것이 아니면 즐겨 먹지 않는 편이다. 그렇기에 크루아상은 나에게 귀로는 친하지만 입으로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스크램블에 남아있던 칠리맛과 게살이 자아내는 짭조름한 향이 크루아상의 밋밋한 맛을 훌륭하게 보완해줬다. 실로 맛있고 조화로운 음식이었다. 다 먹은 뒤에 음미했던 멜버른 플랫 화이트를 더 말하면 입만 아플 것이다.


 식사를 끝마치니 12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비행기 이륙까지 네 시간 조금 넘게 남아있었다. 시드니로 간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내륙선이라 수속부터 탑승까지 채 30분도 걸리지 않을 터였다. (이건 나름 해외에서 내륙선들을 많이 타 본 경험에서 나오는 노하우였다.) 그렇게 치면 공항까지 가는 시간까지 합해서 대략 세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식당을 나와서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문득 오늘 날씨가 정말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내가 멜버른에 있으면서 보냈던 날들 중에 가장 맑고 청명한 날이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뭔가 공원에 앉아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항상 내가 머물던 호텔 앞을 오가며 보기만 했던 플래그 스테프 공원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플래그 스테프 역 바로 앞에 있는 공원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냥 별 볼일 없는 공원처럼 보이겠지만, 생각보다 크기가 꽤 있고 조성도 나름 깔끔하게 되어있는 곳이다. 마침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던 책도 챙겨 왔다. 이런 좋은 날씨에 공원에 앉아서 책을 잠시 읽는다면, 그거야말로 유유자적과 쉼의 완전체 아닐까 싶었다. 물론, 디저트로 먹을 초코빵 하나를 사가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여유가 넘치는 공원


 대충 사람들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고, 초코빵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동화 같은 종류의 책이라 읽는데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역시 나는 백색 소음이 있는 곳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무심결에 저 먼 곳을 응시했다. 초록이 가득한 공원 너머로 고층 빌딩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인다. 자연만 있는 것도, 빌딩들만 있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멋이 있지만 이렇게 두 개의 다른 존재들이 어우러져 있는 게 가장 편안한 것 같다. 내가 도시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자연이 육체적인 편안함을 제공한다면 빌딩들은 심적인 편안함을 안겨다 준다. 익숙한 풍경이라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참 동안 그저 멍하니 이 풍경들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입이 텁텁해진 걸 느낀다. 꾸덕꾸덕한 초코빵을 그리 먹어댔는데 충분히 그럴 만도. 아까 길을 걸어오다가 요거트 집이 있던 게 떠올랐다. 역시 텁텁함 뒤에는 상큼한 요거트가 제격이다.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한 끼 식사 수준의 요거트


 가장 기본적인 플레인 맛에 토핑은 내 마음대로 추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유난히 좋아하는 초코와 시리얼 토핑들을 왕창 넣은 뒤 미친 듯이 흡입했다. 호주에서 먹는다는 기분 탓이라 그런지 요거트의 맛이 평소보다 더 상큼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 착각을 잠시 즐기기로 했다.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했기 때문일까? 시드니로 떠나야 하는 시간이 그리 섭섭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멜버른에서 탄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는, 그저 멜버른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후회 없을 정도로 너무 행복해서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여전히.



안녕, 시드니


 멜버른에서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도착 뒤 짐 정리에 여러 잡무를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저녁이 다 됐다. 내가 잡아놓은 숙소는 도심에서 기차를 타고 대략 20분 정도를 가야 하는 곳이었다. 사실 이렇게 멀 줄 모르고 예약했는데 이제 와서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숙소가 있는 기차역에 도착하니 하늘에는 벌써 주홍빛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바라본 하늘에는 불길할 정도로 붉은 달이 타오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게 남반구에서만 보이는 특별한 현상인 건지, 아니면 그날이 마침 닭이 붉게 보이는 무슨 특별한 날인 건지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는 당시에 한창 화제였던 2019년 호주 산불 때문이었다. 이 시기가 블루 마운틴이 심각한 산불에 고생했던 시점이었고, 산불로 인한 대기 오염으로 인해 달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던 나는 그저 달이 무서우면서도 예쁘다는 생각과 함께 숙소로 향했었다. BTS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라 그런지 길거리 곳곳에 한국 음식점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고, 외국인 가게에서도 BTS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반가움과 동시에 BTS의 인기가 단순히 언론에서 강조하는 게 아니라 진짜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불길하게 붉은 달


 숙소에 짐을 다 정리하고 나니 대략 7~8시가 되었다.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었다. 조금 귀찮았지만, 다시 기차를 타고 시드니 시내로 향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항의 야경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면 완벽한 하루가 될 거라고 자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를 모르겠지만(이유가 없던 건 분명히 아니었다),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부두와 거리가 꽤 되는 Town Hall역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상상도 못 했던 많은 인파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시기도 12월 초라 벌써 연말 분위기가 가득했다. 역시 대도시였다. 이 정도면 사람 지옥이라고 자부하는 서울과 뉴욕만큼이나 붐비는 곳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사실 사람 많은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여행에서는 더더욱. 주위가 산만해지고 괜히 안 봐도 될 눈치를 조금 더 챙기게 된달까? 하지만 시청역 앞에서 마주한 인파는 나에게 거부감보다는 고양감을 줬다. 여행객들이 아니라 이 지역에 살아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생동감에 휩쓸려 나마저도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고, 힘차게 부두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람들로 붐비는 시청


 부두 인근 레스토랑에는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이미 8시를 훌쩍 넘었지만, 오히려 지금이 가장 활력이 넘치는 시간대처럼 보였다. 물론 낮에 이 장소를 방문한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적어도 느낌상으로는 그랬다. 근처에 클럽들이 서서히 영업 시작을 알리고 있었고, 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들이 밤 부두의 쾌락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고양시켰다.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클럽에 가본 적이 없다. 그렇게 가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번잡하고 사람 가득한 곳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클럽에 관련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그저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렇게 여행을 올 때면, 가끔씩은 클럽에 몇 번 가볼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든다. 경험이 전무한 곳이다 보니, 아무리 나 자신이 더욱 용감해지는 해외에서도 클럽에는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남들은 외국에서 가는 클럽이 그렇게 재밌다는데 나에게는 이 역시 먼 세상 이야기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지에 있는 클럽이 궁금한 게 아니라 여행지에 대한 모든 게 궁금한 것이다. 클럽이 그중 하나에 속하는데 방문하지를 못하니 살짝 답답할 뿐. 


아름다운 야경을 보유한 시드니


 아무튼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 시드니의 밤 부두의 분위기가 점점 깊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흥겨운 분위기를 온전히 감당할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가장 큰 건 아무래도 체력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뭔가 이런 급작스러운 마음으로 시드니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으로 치자면 오늘은 그저 정찰 혹은 척후에 불과했다. 본 일정은 내일부터 체력 든든한 상태로 시작하고 싶었다. 힘들 때는 신경이 무뎌지는 법. 하나하나 다 담아내기도 모자랄 판에 지친 몸상태 때문에 시드니를 대충 즐기고 싶지 않았다. 더욱 사람들이 많아져가는 항구 인근을 뒤로하고, 다시 기차역으로 가서 숙소로 향했다. 밤 항구를 비추는 수많은 빛들 때문이었을까? 애석하게도 멜버른의 잔상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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