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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등반보다 힘들다는 결혼 생활

동생의 전화

by 마더 R


시집간 동생에게 저녁 9시 무렵 전화가 왔다.


그녀는 2년 전 내 보금자리 근처에 청약당첨이 됐었다. 올해 초 입주였는데 LTV, DTI 규제로 아직 신혼집에 입주를 못했다. 그때는 당장 LOTTO 맞은 것처럼 다들 축하해 주고 본인도 무척 부러워했었다. 막상 이렇게 눈앞에 두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니 서로 말은 못 해도 속상하기만 하다. 큰 언니로서 도와주지 못해 쓰라린 마음이 든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시댁에서 임시로 살게 됐는데 퇴근길 편도만 1시간 반이나 걸려 무척 고되다고 했다. 하기사 친정은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 다니긴 했어도 늘 잠실 안짝이었다. 지금은 강남 귀퉁이에 자리 잡으셨는데 서울시내 어디든 1시간 내에 당도하니 교통편이 참 좋은 편이다.


한 40년을 그렇게 살아오다가 서울 밖에 살며 출퇴근하려니 가끔 서러움과 남편 탓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몸이 힘들기 시작하면, 마음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요즘 제주를 배경으로 한 "폭싹 속았수다"드라마 클립을 재밌게 보고 있는데, 완결이 아니라 정주행은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짤막한 영상만으로도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재주가 있더라. 아들 둘을 낳고 나서야 애순과 관식의 그것처럼 부모님의 아까운 20대 청춘을 상상해 보게 됐다.


공무원이신 아버지 외벌이로 두 분이서 어찌 4남매를 키우셨을까?


겨우 초등생 두 녀석 학원 한두 개 보내는 것만으로도 가끔 기가 막힐 때가 있는데, 그분들의 수고로움과 감사함을 헤아리게 된다.

글을 쓰며 가만히 손에 꼽아보니 대기업의 한 인재원에서 식을 올린 후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도 부동산은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거렸다.

하락장이었고, 부모님에겐 아직 돌봐야 할 동생 3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정말 돈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그분들께 감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종잣돈 없이 신혼집을 구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새신랑이 살던 염창역의 5평짜리 오피스텔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친정은 30년 넘은 낡아빠진 구축이긴 했었도 40평대의 너른 집이었다. 결혼 전에는 녹물 나오는 오래된 집이라고 불평이 가득했는데 남편 신발과 나란히 벗어두면 꽉 차는 비좁은 현관에 들어설 때 그곳과 맞대어 붙은 싱크대에서 밥 먹은 그릇을 씻을 때 매일 기가 막혔다.


염창역은 9호선 급행 정거장이라 강남역까지 쾌속이라고 좋아했지만 서울시에서 교통량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아 달랑 열차 두 칸으로 시작됐었다. 새벽 7시에 나가도 6시에 나가도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수많은 직장인들을 저주하며 열차 칸에 겨우 몸을 욱여넣었다. 그 열차를 놓치면 정말 끝이었다. 지하철이 아니라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여의도를 지나 사당까지 가는 것은 택시비도 택시비였지만 지각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게 3개월쯤 흘렀을 무렵 임신이 됐다가 피로해서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임신 6주 차에 자궁 외 임신으로 첫 아이를 잃었다. 아이를 잃고 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정서적 육체적 안정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경기도지만 회사 부근에 30년이 돼가는 17평 방 두 칸짜리 아파트를 매매했다. 분명 바로 신혼집으로 마련했다면 감사함이 없었을 텐데, 5평에 살다가 17평이 되니 대궐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회사복지로 제공하는 무이자 대출지원과 회사 급여보증으로 쉽게 집을 살 수 있었다. 정말 동생에 비하면 호시절에 시집갔다. 당시 부동산은 얼어붙어있어 매매할 때 동료들은 용감하다는 부정적 시선을 보냈지만 아이 잃은 어미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돌이켜보면 고난이 축복인 것 같다.


동생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아니~근데...'라고 운을 뗐다. 시간을 흘깃 보니 아마 시댁에 다 도착했을 즈음인데 속상한 일이 생겼는데 어디 말할 때가 없는 모양새다. 결혼하고 나면 참 말할 곳이 애매해진다. 분명 다들 행복하기만 할 거라 했는데 사무치게 외로웠던 날들이 많았다. 남편과 다투기라도 한날은 집에서 뛰쳐나오고만 싶고 하염없이 울고 싶은데 누가 거리에서 쳐다볼까, 그렇다고 카페에 앉아있자니 사연 많은 여자처럼 보일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전화가 오면, 늘 3번 벨이 울리기도 전에 받는다, 만약 부재중 통화가 와 있다면 바로 문자를 넣거나 확인 전화를 하는 편이다.

신혼은 아마도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막막하고 답이 없어 보이는 때일 테니... 이렇게라도 버팀목이 돼줘야지.


사연을 들어보니 남동생에게 삐졌다.

최근 친정 집에서 자신이 머물던 방을 비운 그녀는 처분해야 할 책들이 여러 권 있어 알라딘에 매물을 내놔야만 했다. 물건이 쌓여있는 걸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친정아버지로부터 이미 여러 번 잔소리와 당부를 들은 모양이었다. 출퇴근 길에만 3시간을 쏟아붓다 보니 남동생에게 부탁해 대신 매물을 올려주면 판매된 값은 모두 주겠노라 약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이틀 일주일 시간이 흐르도록 남동생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올렸어?" 확인 전화를 하면, 그저 "미안해 시간이 없었어"라고 일관된 대답을 했을 터였다.


첫째라 그런 걸까 자동으로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하소연을 듣는 내내 친정에 있어주지 못해 마음이 안타까웠고, '속으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습관적으로 그녀는 성인이고 직장인인 남동생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연민에 빠져 그녀의 상황 안에만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도 결혼을 막 한 후 친정에서 내 물건들을 빼와야 하는 때가 있었다. 당시 거주하던 곳은 겨우 5평이라, 거의 다 내다 팔거나 눈물을 머금고 처분해야만 했다. 둘째는 늘 바쁘고 셋째는 감정기복이 심했어서 결국 늘 유하고 배려 깊은 막내에게 자주 부탁하던 습성이 있었다. 착한 심성을 가진 그는 친정엄마에게 가족들에게 늘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부려졌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꽤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상담받고 그러더니 일종의 적용을 하는 것이 보였다. 어느 날 날 대하던 그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미안해, 바쁘게 살다 보니 부탁을 잊었네 어쩌지?'라고 연락할 때마다 무미건조하게 내뱉는 똑같은 대사는 부탁을 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함부로 하지 말아 달라는 소극적 변론이었다. 그만해 달라고 말해도 소용없을 테니 제발 깨달아달라고...


그래서 그 이후로는 막내가 조카를 잠깐이라도 봐준다던가 따뜻한 커피를 내려주면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게 됐다. 바쁜 막내가 날 위해 일부러 시간을 쓰고 호의를 베푸는구나! 하고 말이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무지하다. 오직 당한 사람만이 깨닫고 변화된다.


그녀가 앞으로 겪을 것들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진짜 독립적 어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 중 하나인 것 같아 창자가 살짝 아리면서도 다행스러운 마음이 든다.

같은 상황에 처한 후 쩔쩔맸던 적이 많았다. 그땐 나도 막내는 '왜 이리 답답해 아오 방에만 틀어박혀서는 겨우 그걸 못해주는 거야!' 하며 마음껏 탓했다. 가족이라도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우린 함부로 대한다.


이번 경험이 그녀에게 분노가 아니라 울림이 되길 바라며 통화를 마쳤다.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이 이 어두운 터널을 잘 뚫고 나가기를 기도한다.


feat. 히말라야 등반보다 힘든 결혼 생활하는 이들 모두 짜요! (加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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