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부터 탈식민주의까지, 헌법 변천사 쉽게 따라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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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헌법'이라고 할 때, 흔히 딱딱하고 변하지 않는 국가의 기본 규칙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헌법은 살아 숨 쉬는 역사 그 자체이며, 특히 격동의 20세기를 거치며 극적인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제국의 몰락, 새로운 이념의 등장, 식민지의 해방 등 거대한 역사의 파도 속에서 헌법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을까요? 이 글은 20세기 헌법의 흥미진진한 여정을 따라가며, 그것이 어떻게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재정의하고 현대 세계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살펴봅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인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역사가들은 전쟁의 발발 원인만큼이나, 왜 분쟁이 그토록 빠르게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는지에 주목합니다. “단순한 사고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결과”라는 견해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초강대국 간 경쟁으로 국제 정세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화약고”와 같았다는 점입니다.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성은 이 화약고에 불을 붙였고,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불과 4년 만에 세계는 초토화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오스만, 독일 등 거대한 제국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 전쟁은 단순히 국경선을 바꾼 것을 넘어, 국가의 본질 자체를 변화시켰습니다. 폐허 속에서 국가들은 생존과 재건을 위해 사회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야 했습니다. 이전까지 사회와 경제 활동의 무대를 제공하는 데 그쳤던 국가는, 이제 무대 위에서 직접 연기하는 적극적인 행위자로 변모했습니다. 국가는 투자자, 규제자, 중재자 역할을 하며 경제에 깊숙이 개입했고, 시민들의 삶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시민들을 더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결속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위해 ‘민족주의(Nationalism)’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시민은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행위자, 심지어 국가의 부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보통선거 제도의 확산, 노동자·민족·종교 집단 등 다양한 사회 집단에 대한 권리 부여는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헌법은 이렇게 새롭게 확장된 ‘우리’라는 개념, 즉 국가와 밀접하게 결합된 동원된 시민 공동체를 규정하고 관리하는 핵심 도구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국가는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회적 포용성과 일반화의 수준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이는 헌법적 메커니즘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국가 모델은 마치 토마스 홉스가 묘사한 ‘리바이어던(Leviathan)’과 같았습니다. 수많은 개인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적 국가를 이루고, 국가는 사회 전반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이끌어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새롭게 제정되거나 개정된 헌법들에 반영되었는데, 이를 민주주의-조합주의(Democratic-Corporatist) 헌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조합주의(Corporatism)’는 경제, 산업, 농업, 전문직 등 특정 집단(조합)의 대표들이 국가 정책 결정 과정, 특히 경제 및 사회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통치 체제입니다. 이는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와, 계급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세우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시도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입니다. 이 헌법은 민주적 헌정 체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정부, 사용자,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는 ‘중앙노사협의회(Zentralarbeitsgemeinschaft)’와 같은 조합주의적 기구를 설치하여 집단 간의 협의와 조정을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모델은 당시 많은 국가, 특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 파시즘 하에서 실질적으로 조합주의로 전환), 스페인, 포르투갈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조합주의적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 헌법들이 ‘민주적’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인의 자율성에 기반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민주주의는 "시민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집단 투표를 통해 국가 정책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집단 권리, 이익, 정체성을 실현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 국가, 민족으로부터 정체성을 부여받았고, 이는 곧 국가에 일정 부분 봉사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했습니다. 마치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속 노동자처럼, 개인은 거대한 국가 기계의 일부로 동원되는 존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은 사회주의 이념이 거센 물결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였고, 이는 헌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장 급진적인 사례는 1918년 러시아 헌법입니다. 이 헌법은 "모든 재산과 생산 수단을 몰수"하고 노동자 계급에게 명목상의 최고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헌법이 되었습니다.
멕시코 역시 1917년 혁명 이후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는데, 러시아 혁명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전면적인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멕시코 헌법은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고, "무상 비종교 교육의 권리, 노동자 권리, 대규모 토지 소유에 대한 제한, 외국인의 토지 소유 제한" 등 사회주의적 성격의 조항들을 다수 포함했습니다. 민주주의와 보통선거를 규정했지만, 현실에서는 제도혁명당(PRI)의 장기 집권으로 이어져 "수십 년 동안 반(半)독재적 체제"가 유지되었습니다.
다른 사례들도 있습니다. 레바논은 1926년 헌법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공동체 간의 권력 배분을 위한 복잡한 종파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습니다. 아일랜드는 1937년 헌법에서 멕시코나 바이마르 헌법보다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덜하지만, 천연자원과 재산에 대한 국가의 규제 권한을 명시하고, 시민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조국에 대한 충실은 모든 시민의 기본적인 정치적 의무"라고 규정하며 국가 중심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주의적 이념이 헌법에 스며들면서, 국가의 역할과 시민의 권리 및 의무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가장 보편적인 정부 형태였던 군주제는 급격히 쇠퇴하고, 공화국이나 다른 형태의 대중 정부가 그 자리를 대체해 나갔습니다. 1900년부터 1939년 사이에 수십 개의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국민에 의한 통치’라는 개념이 점차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1년 1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 연설은 전쟁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의 기초를 놓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안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미래의 날들 속에서, 우리는 네 가지 핵심적인 인간의 자유 위에 세워진 세계를 기대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자유를 제시했습니다.
(i) 표현의 자유: "세계 어디서든 말하고 표현할 자유"
(ii) 종교의 자유: "세계 어디서든 각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신을 숭배할 자유"
(iii)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나라가 국민에게 평화로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경제적 합의"
(iv) 공포로부터의 자유: "어떤 나라도 이웃 국가에 물리적 침략을 감행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이 자유들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이 자유들은 특정 국가나 민족, 전통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어디서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연설에는 전통이나 역사, 국가, 민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둘째, 고전적인 시민적·정치적 자유를 넘어, 결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자유까지 포함했습니다. 이는 정부가 단순히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소극적 역할을 넘어, 시민의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이 자유들은 어떤 신성한 권위나 자연 상태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세대 안에 실현 가능한 세계의 구체적인 기반"으로서, 인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과제로 제시되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이를 독재자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질서(New order)’에 맞서는 ‘도덕적 질서(Moral order)’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루스벨트 자신은 이 비전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45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1948년 유엔(UN)의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UDHR)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UDHR 제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 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고 선언하며, 루스벨트가 제시한 보편적 인권 사상을 국제 규범으로 확립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과 신생 독립국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형의 헌법, 즉 ‘해방 헌법(Liberation Constitutions)’이 등장했습니다. 이 헌법들은 루스벨트의 '네 가지 자유'와 세계인권선언에서 나타난 보편적 인권 사상을 핵심 가치로 삼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1947년 발효된 일본 ‘평화 헌법’입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주도 아래 불과 열흘 만에 초안이 작성되고 번역된 이 헌법은, 국민주권을 기반으로 천황의 상징적 지위, 의회 중심의 민주주의 체제, 권력 분립과 법치주의를 명시했습니다. 특히, 헌법 서문에서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운 평화로운 삶을 누릴 권리"를 인정하며 루스벨트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반영했습니다. 일본 헌법은 또한 기본적 인권을 "인류의 다년에 걸친 자유 획득 노력의 성과이며, (...) 침범할 수 없는 영구한 권리"로 규정하고, 이러한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은 개정될 수 없도록 하는 일종의 헌법적 잠금 장치(constitutional lock)를 마련했습니다.
1949년 제정된 서독 기본법(Grundgesetz) 역시 유사한 특징을 보입니다. 독일인 전문가들이 주도적으로 초안을 작성했지만, 연합국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이 헌법 역시 "침해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모든 공동체의 기반이자 세계 평화와 정의의 근거"로 선언하며 인권의 보편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독일 기본법 제79조의 ‘영구조항(eternity clause)’은 인간 존엄성, 민주주의, 연방제, 법치국가 원칙 등 헌법의 핵심 가치를 담은 조항(제1조-제20조)의 개정을 영구히 금지하여 과거 나치즘과 같은 비극의 재발을 막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헌정 질서가 파괴될 경우 시민들에게 "다른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저항할 권리"를 부여하여 헌법 수호의 최종 책임을 국민에게 맡겼습니다.
1948년 이탈리아 헌법 또한 파시즘에 대한 반성으로 자유의 개념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사회적 자유’를 강조하며, 보건, 사회보장, 교육, 공정한 임금, 단체교섭권, 파업권 등 사회권을 명시하여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했습니다. "글을 읽거나 쓸 수 없는데 추상적인 표현의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처럼 전후(戰後) 해방 헌법들은 보편적 인권 보장을 핵심으로 삼고,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대만(1947), 대한민국(1948), 인도(1949) 등의 헌법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인 동유럽과 중유럽 국가들(알바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은 서유럽과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이들은 1936년 스탈린 헌법을 모델로 한 공산주의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공산주의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와 공산당의 절대적 우위입니다. 국가는 시장, 경제, 사회 전반을 완전히 통제하며, 이 국가는 유일 정당인 공산당에 의해 지배됩니다. 서구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삼권 분립은 부정됩니다. 모든 공권력은 하나로 통합되어 당과 정부를 통해 표현되며, 사법부 역시 독립성을 가지지 못하고 당의 지도에 복종해야 합니다.
공산주의 헌법에도 시민의 권리와 자유 목록이 있지만, 이는 주로 국가가 보장해야 할 사회적 권리(주거, 노동, 교육 등)에 초점을 맞춥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국가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나 경제 행위자들이며,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1949년 헝가리 헌법은 법원이 '노동 인민의 적'을 처벌하도록 명시했습니다. 개인의 필요보다는 "'전체'로서의 노동 계급의 필요"가 항상 우선시됩니다.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헌법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1954년 중국 헌법 서문은 헌법의 목적이 "과도기적 시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가의 기본 목적과, 대중이 염원하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것"이라고 명시했습니다. 헌법 자체가 불필요해지는 유토피아를 향한 과정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델은 1970년대 후반까지도 일부 매력을 가졌으나, 결국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실패한 실험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UN 헌장에 명시된 민족 자결권 원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힘을 얻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탈식민화의 거대한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인도네시아(1945/1949), 베트남(1945/1954), 인도(1947)를 시작으로 수많은 식민지가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1910년 56개국에 불과했던 독립국은 1970년 142개국, 2000년에는 178개국으로 늘어났습니다.
새롭게 독립한 국가 대부분은 헌법을 공포했습니다. 정치학자 이보 두하체크는 1973년에 "현존하는 국가 헌법의 3분의 2 이상이 지난 30년 사이에 초안 작성되고 공포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식민 종주국의 헌법과 헌정 체제를 ‘유산’ 또는 ‘지참금(dowry)’처럼 물려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영국은 "약 50개의 법률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받으며, 영연방 국가들에 소위 ‘웨스트민스터 수출 모델(Westminster Export Model)’이라 불리는 의회 중심 정부 체제를 이식했습니다. 법률가 윌리엄 데일 경에 따르면, 영국 정부 법률가들은 "최소한 33개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독립 헌법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려받은 ‘hand-me-down constitutions’은 종종 신생국의 복잡한 사회·정치적 현실, 특히 다민족적 구성과 잘 맞지 않았습니다. 서구식 단순 다수결 민주주의는 소수 민족이나 집단의 이해를 배제하기 쉬웠고, 이는 불안정, 쿠데타, 독재 정권의 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아프리카의 경우, 독립 초기 민주주의 실험 이후 권위주의적 일당제 시기를 거쳐, 1980년대 후반부터 다시 다당제 민주주의, 권력 분산, 기본권 강화를 추구하는 제3, 제4의 헌정 변화 물결을 겪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헌법이 기성복에서 "점차 정교하게 재단되어 오래 입을 수 있는 '맞춤복'의 형태로 발전하는 것"과 같지만, 잦은 헌법 개정은 "헌법이 정치 체제에 부여할 수 있는 안정성과 상징적 가치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낳고 있습니다. 헌법적 정당성 확보는 많은 탈식민 국가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1974년 4월, 포르투갈 리스본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흘러나온 파울루 드 카르발류의 노래 ‘E Depois do Adeus (그리고 작별 이후)’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라자르 독재 정권의 후계자인 카에타누 정권에 대한 작별 인사였고, 빈곤과 억압, 식민지 전쟁에 대한 종언을 고하는 혁명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병사들의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았고, 군부는 시민들의 봉기를 지지하며 무혈 쿠데타를 성공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네이션 혁명’입니다.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스페인(1975년 프랑코 사후), 그리스(1973/1974년 군사정권 붕괴), 터키(1983년 군정 이후) 등 남유럽 국가들도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 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 국가는 새로운 탈(脫)독재 헌법(post-dictatorial constitutions)을 제정했습니다(포르투갈 1976년, 스페인 1978년, 그리스 1975년, 터키 1982년).
이 헌법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서유럽 국가들이 채택했던 ‘권리 중심의 헌법’과 많은 특징을 공유합니다. 즉, 과거 독재 정권 하에서의 권력 남용과 인권 억압에 대한 반성으로, 기본권 보장과 법치주의, 민주적 통치 구조를 핵심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이 국가들은 1945년 종전 직후의 민주화 흐름에 제때 합류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며 헌법을 통해 그 기반을 다진 셈입니다. 저자 크리스 손힐은 "1945년 직후 헌정적 전환과 권리 기반의 정치 구조를 수립하지 못한 국가들은 (...) 정당성의 위기에 특히 예민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평가합니다.
이들 탈독재 헌법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해당 국가들이 안정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고 유럽연합(EU)에 가입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 독일 헌법처럼 독재로의 회귀를 막기 위한 헌법적 잠금 장치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 헌법 제120조는 "헌법의 수호는 그리스 국민의 애국심에 맡겨진다. 헌법의 폭력적인 폐지를 시도하는 자에 대하여 그리스 국민은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저항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규정하여, 헌법 수호의 최종적인 책임을 국민에게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주화와 인권 존중의 흐름은 20세기 내내 지속된 군주제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글의 원문(헌법 이야기 제14-15장 번역본)은 20세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헌법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왔는지를 흥미롭게 추적합니다. 단순히 법 조항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대전, 이데올로기 대립, 탈식민화, 민주화 등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과 맞물려 헌법이 어떻게 국가의 성격, 정부와 시민의 관계, 그리고 국제 질서를 규정하고 또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민주주의, 조합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인권 중심주의 등 다양한 이념이 헌법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경쟁했는지 비교하며 살펴보는 것은 현대 정치 체제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특히 '리바이어던 헌법', '해방 헌법', '탈식민 헌법', '탈독재 헌법'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헌법 유형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국가 사례를 통해 설명함으로써, 헌법이 단순한 법문서가 아니라 역사의 역동성을 담아내는 그릇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헌법의 역사를 생생한 이야기로 접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본 글은 Wim Voermans, The Story of Constitutions (2023), Chapters 14-15. 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문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