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그림접시2020
기나긴 우기를 지나 몇 번의 태풍이 지나갔다.
아버님께 아침 일찍 안부 전화를 드리니 태풍이 곱게 지나가지 않았더랬다. ' 산 밑의 밭이 아주 망가졌어. 포클레인을 불러서 다시 정리해야 해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죄송해하니, 씩씩하게 매일 술도 잘 먹고 밥도 잘 먹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아버님은 쓰라린 상처에도 툭툭 털고 빨간약 대신 소주 한 컵 드시고 괜찮다 하신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어쩔 땐 농사를 짓는 것이 도시의 셈으로 더 손해인 것 같다고 많이 하시지 말고 조금만 하라고 말려봤다.
돌아오는 답은 내 앞에 있는 땅 놀리는 게 더 괴롭다 하셨다.
앞에 있는 일을 못 본 척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거절하지 않는 것이 아버님이라는 걸 이제는 알아버렸다
<집 앞 텃밭/2020초가을 >꾀부리고 싶을 때마다 아버님을 생각하고는 따꼼해질 때가 있다.
집 앞 손바닥만 한 마당을 가꾸는 일도 꾀가 나고 귀찮아질 때가 있다.
잡초만 무성해진 텃밭과 말 안 듣는 연장을 탓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밭을 갈고 동네 화원에 갔다.
배추 모종밖에 없어 삼천 원어치를 사서 텃밭에 심었다.
오후엔 남편과 통화를 했다(폴란드에 있는 남편에겐 오전이지만)
9월에 온다던 남편은 코로나로 이동이 불편해져 본인이 좀 더 남아 있겠다고 했다.
으이구 완전 아버님을 똑 닮았다.
남편도 앞에 있는 일들을 못 본척하지도 계산하지 않고 본인이 맡아버렸다.
여름옷만 잔뜩 싸가지고 간 남편에게 더 추워지기 전에 가을 옷 미리 사 입고 단디 몸 챙기라고 했다.
머나먼곳에서 남편이 돌아올 수 있도록 좋아하는 구수한 배추 된장국을 끓여놓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