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배터리가 이어준 우리의 사랑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한 대학의 비건동아리 모임에서였다. 나는 2024년 1학기에 학점 교류 제도를 통해, 그녀의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다. 다른 비건 모임에서 그녀의 학교 비건동아리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학점 교류를 온 기념으로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때 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는 롤러장이었다. 우리에게는 무료로 롤러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식사 전에 같이 가보기로 한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롤러장에서 처음 본 그녀는 매우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연한 색들을 좋아하는데, 그녀는 그날 하늘색과 연보라색 옷을 입고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록달록한 그녀의 가방이 굉장히 귀여웠다.
롤러장에서 재밌게 시간을 보내고, 근처 카레집에서 식사를 했다. 나는 비건에 대해 관심은 있었지만, 실천을 하고 있지는 않았고, 그녀는 3년 전부터 완전한 비건이 되었다고 했다. 식당에서는 대학교에서 비건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여느 대학생들처럼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나는 학점교류를 온 학생이었기에 이 학교에 대해 궁금한 점들이 많았고, 친구가 없어 그동안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봇물 터지듯이 물어보기도 했다.
대화를 한참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와 나는 집에 가는 방향이 비슷해서, 같은 지하철을 탔다. 처음 보는 사이였고, 지하철에서 나란히 앉아서 가다 보니 서로 어색한 대화가 오갔다.
나는 잠깐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내향적이고, 차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 스스로가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나의 본능대로 대화를 나눴다가는 그녀의 에너지가 고갈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화하고 싶은 마음과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지하철은 내가 내리는 역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고, 나는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녀의 휴대폰을 봤고, 배터리가 1%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출시한 지 약 6년이 된 아이폰 XS를 쓰고 있었고, 배터리 효율이 많이 떨어져 보조 배터리를 항상 가지고 다녔었다.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집까지는 내가 내리는 역에서 1시간 정도는 더 가야 함을 알고 있었고, 휴대폰 없이 길 위에서 1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에, 나는 그녀에게 보조배터리를 빌려 주려고 했다.
휴대폰 배터리 없는 것 같은데, 보조배터리 빌려드릴까요?
사실, 이 말을 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그녀의 휴대폰을 힐끔 쳐다봤다는 것을 알면, 싫어할 것 같기도 했고, 초면에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 계속 마음이 쓰여, 혹시나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괜찮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거듭되는 나의 제안에 보조배터리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인사를 하고, 각자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 호감이 생겼던 포인트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봤다.
나는 처음 롤러장에서 봤을 때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호감이 생겼다고 이야기했고, 그녀는 내가 자신의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기꺼이 보조배터리를 빌려주는 친절하고 다정한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호감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보조배터리를 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관찰하다 보니, 휴대폰의 배터리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도 배터리가 꺼진 채 집까지 갔던 경험이 많은데, 그때마다 심심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가 집까지 가는 길에 심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보조배터리를 빌려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 만난 지 약 4개월 만에, 썸을 탄지 약 1달 만에 연애를 시작했고, 우리는 보조배터리가 이어준 사이라고 서로의 첫 만남을 추억하고 있다.
나와 그녀 모두 아이폰을 쓰고 있어, 공유 앨범에 함께 있을 때 찍은 사진이나 공유하고 싶은 사진을 올리는 앨범을 활용하고 있는데, 그 공유 앨범의 이름은 '고구마들'이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는 남들이 보기에는 우리의 연애가 서툴고, 느리고, 답답해 보일 수 있어도 우리끼리는 서로를 느리지만 확실한 사랑을 하고 있고, 남 눈치 보지 않고, 우리만의 페이스대로 이쁜 연애를 해보자는 의미에서 고구마들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나는 연애 초반부터 우리의 연애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고 있다.
느리지만, 확실한 사랑.
우리의 고구마 연애일지를 시작한다.
Since 2024.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