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우리의 타이베이 여행은 단조로웠다. 대부분의 날이 “여행”이라기보다는 잔잔한 일상에 가까웠다. 타이베이에서 보낸 시간이 사나흘 쌓이자 자연스레 우리 둘만의 “루틴”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엄마와 딸, 우리 둘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니까, 여행 루틴 썰은 아이의 기상부터 풀어보겠다. 아이는 7시 즈음이 되면 어김없이 “엄마!? 엄마!?” 하는 귀여운 목소리로 나를 찾는다. 아이 목소리를 쫓아 아이에게 간 나를 발견하면 아이는 온 힘을 다해 나를 꼬옥 안아준다. “Good Morning.”
그리곤 욕실로 가서 깨끗하게 세안을 하고 예쁘게 머리를 매만진다. 장난감 화장품으로 톡톡톡 볼 터치까지 한다. 아이의 언어로는 “꾸미는 거”라는데.. 그 모습은 정말이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척 귀엽다.
아이의 기상 후 “꾸밈” 시간이 끝나면 남편, 아이, 그리고 나는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여러 번 생각한 건데, 대만 타이베이 여행 중 머물렀던 호텔(메트로폴리탄 프리미어 타이베이)의 조식 뷔페는 진짜 최고였다.
멋진 뷔페에서 한 시간가량 아침 식사를 하고 난 후 아이와 나는 다시 룸으로 컴백. 그리고 각자만의 아침 시간을 갖는다. 보통의 경우 나는 회사 업무를 follow up 하고, 아이는 유튜브를 시청한다. 한국에서라면 유튜브 타임은 주말에나, 그것도 엄마가 운동 갔을 때나 겨우 볼 수 있는 특별한 즐길 거리인데, 여행 중에는 -엄마가 일하는 동안만큼은- 매일 유튜브 타임이 있으니 이 시간이 아이에겐 꿀인 거다. 각자가 따로 보내는 아침 시간은 일반적으로 40-50분 정도.
그리고 느지막한 아침, 그러니까 오전 10시 반 즈음이 되면 그제야 우리는 호텔을 나서 신나는 여행을 시작한다.
우리의 단조로운 타이베이 여행 넷째 날에도 같은 루틴이었다. 오전 10시 반 즈음 우리는 호텔을 나와 중정기념관으로 향했다. 모처럼 맞이하는 따스한 날이라서 그런지 중정기념당으로 가는 길, 아이와 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날보다 더 가벼웠다.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중정기념당의 푸른 기와는 푸른 하늘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중정기념당은 날씨와 참, 잘 어울리는 명소였다. 푸른 하늘, 푸른 기와 아래에 선 아이의 새하얀 드레스가 더더욱 빛이나 보였다.
대만 타이베이의 중정기념당은 (매번 등장하는) 대만 초대 총통 장제스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라고 한다. 하얀 대리석과 푸른 기와로 지어진 기념당 외에도 붉은 기와의 쌍둥이 건물-국가희극원과 음악원-, 그리고 그 두 건물 사이로 넓게 펼쳐진 자유광장은 이곳을 찾는 이를 압도할 만큼의 웅장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 영 웅장하기만 한 것은 아닌데, 이 웅장한 건물들을 중심으로 양옆에 펼쳐진 산책로와 커다란 고목들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자연이 주는 특유의 편안함을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이 공간에서는 웅장함과 편안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참 신비로운 곳이다.
중정기념당 내부에서는 다양한 전시를 제공하고, ‘중정기념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제스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를 전시한 역사관도 운영하고 있다. 이곳만 찬찬히 둘러봐도 대만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쁜 드레스와 왕관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네 살 여자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장제스 총통의 결혼사진이었다. 아이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내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왕관을 꺼내 쓰고, 결혼사진 앞에 서서 사진을 찍어 달라며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아이는 그곳을 지나가던 모든 이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부끄러움은 엄마의 몫)
우리가 여행하던 무렵, 중정기념당에서는 (아마도) 대만의 민주화와 관련된 전시도 한창이었다. 전시의 심오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어린이들이 쉽게 다가가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된 전시처럼 보였다. 그 퀄리티가 어느 정도였냐면, 중국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 딸이 좋아할 정도. 이 부분은 말이 더 필요치 않다. 퀄리티 높은 전시 덕에 아이가 신나게 놀 수 있어 정말 좋았다.
내부 전시관을 관람한 후 우리는 중정기념당 밖으로 이동했다. 매시 정각에 진행되는 근위병 교대 행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중정기념당 앞 광장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정각이 되자 근위병들이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칼군무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는 사실 내가 보고 싶어서 아이를 데려간 것이었는데, 정작 더 즐긴 건 나보다 아이였다. 아이는 얼마나 열심히 지켜봤던지, 퍼포먼스가 끝난 뒤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짚어냈다. 근위병들 중에는 총을 든 군인과 그렇지 않은 군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내게 묻기까지 했다.
엄마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찾아왔다. 허허. 어물쩍 넘어갈까 하다가, 이 퍼포먼스에 대한 아이의 관심이 재미있기도 해서 함께 교대식 영상을 다시 돌려보았다. 총을 든 군인과 그렇지 않은 군인을 하나하나 살펴본 뒤, 총을 들지 않은 군인은 아마도 각 조의 대장, 리더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대장이 뭐냐고 다시 물었고, 그렇게 우리는 끝나지 않는 긴 대화를 나누며 타이베이 시내를 걸었다.
네 살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가볍다. 여행 일정은 황당하리만큼 간소하다. 가까운 동선 안에서 오전에는 한 곳을 둘러보고, 점심 식사 후에는 다른 한 곳을 둘러본 뒤 호텔로 돌아가는 식이다. 하루에 돌아볼 장소는 많아야 두 곳. 그중 한 곳이 박물관이나 전시관 같은 실내 공간이라면, 다른 한 곳은 공원이나 놀이터처럼 야외 공간이다. 이렇게 하루의 실내와 실외 활동의 균형을 맞춘다. 이것이 바로 길고 긴 고민 끝에 만들어낸, 아이와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체력과 컨디션을 모두 고려한 최상의 일정이다.
오전 내내 중정기념당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그날, 오후 일정은 다안삼림공원 투어였다. 다안삼림공원은 대만의 센트럴파크로 불릴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도심 속 녹지 공간이라고 알려져 있다. 센트럴파크에 비교되는 명성과 더불어 과거에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인지라,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기대했던 장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나의 계획은 점심 식사 후 다안삼림공원으로 이동하는 길에 아이가 낮잠을 자고, 나는 아이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공원의 초록 속에서 조용히 커피 한 잔을 즐기는 것이었다. 세상 일이 계획대로만 착착 진행된다면, 심심해서 어찌 살겠는가.
중정기념당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본 뒤 아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행진을 이어갔고, 낮잠 따위의 유혹은 가볍게 물리쳤다. (내 딸은 정말이지, 의지의 한국인이다.) 덕분에 나의 커피 타임은 굿, 굿바이.
잠 따위 말끔하게 물리쳐버린 아이는 다안삼림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놀이터로 달려갔다. 전 세계의 아이들이 사랑하는 바로 그 공간. 다안삼림공원의 놀이터는 다른 공원보다 규모도 크고 놀이 기구도 많았으며, 무엇보다 아이들이 많아 딸아이는 더욱 신나 보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놀이 기구를 타고 깔깔 웃는 아이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아이와 여행만 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의 놀이터에서도 아이는 늘 행복하게 노는데, 그때의 나는 왜 ‘평생 아이와 놀이터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다안삼림공원은 상상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었다. 커다란 나무와 넓은 연못이 멋스럽게 조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유모차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한 시민을 위한 배려가 공원 곳곳에서 느껴졌다. 곳곳에는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 여행 후, 일상으로 돌아가거든 나 역시 저 사람들처럼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보기도 했다.
다안삼림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아이의 요구에 놀이터에 한 번 더 들렀다. 아이는 그네를 타고 미끄럼틀을 탔다. 나는 그네를 (열심히) 밀어주고,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
다안삼림공원을 나선 뒤, 아이는 택시도 지하철도 타기 싫다며 칭얼거렸다. 아이가 싫다는데 굳이 뭔가를 탈 필요가 있을까? 천천히 걸어서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 길이 참 좋았다. 해 질 무렵의 타이베이는 낮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걷던 그 길은 이번 여행의 어떤 장면보다 더 진하게 내 마음에 남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호텔에 도착했고, 우리의 하루도 자연스럽게 접혔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이 여행은 늘 하늘 위를 날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