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by 김샤갈



아직은 많이 낯선 나라에서 맞이한 첫 번째 아침. 호텔의 묵직한 암막 커튼에도 불구하고 아침 6시 즈음 눈을 떴다. 생경한 아침이었다. 이토록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이 여행 전, 매일 아침 느끼던 ‘아, 또다시 회사에 가야 하는 건가.’ 그런 한숨 가득한 불만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 몸에 붙어있는 지방이 6.5kg 정도는 사라진 듯한 가벼움마저 느껴졌다.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것 같은 아침이었다.


커튼을 열고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온몸으로 품었다. 향기로운 비누로 세수를 하고, 가볍게 메이크업을 마쳤다. 남편과 아이가 일어날 수 있게 신나는 캐럴의 소리를 몇 단계 높였다.


우리의 첫 번째 아침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여행을 떠나온 모두에게 완벽한 시간이었다.


근사하게 준비된 아침 식사용 뷔페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후, 아이와 나는 신이 난 발걸음으로 대만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의 첫 목적지는 호텔 옆 놀이터였다. 밑줄 쫙 별표 다섯 개짜리 팁인데, 만 3살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그 시작은 마땅히 놀이터여야 한다. 아이의 기분과 만족도를 동시에 높여 여행의 흐름을 수월하게 이끌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시간과 엄마의 체력 분배인데, 이 둘 중 하나라도 실패하는 순간 하루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네 타는 ‘춘향이’의 시중을 한참 든 후, 춘향이의 마음을 잘 살핀 후, 슬슬 진짜 대만 여행에 시동을 걸었다.


첫날의 여행 계획은 이러하였다.

타이완 1급 고적이라는 승은문 (북문)을 보고, 쑨원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장제스가 그의 투숙 흔적을 남기기 위해 정원을 증축하고 쑨원의 호를 빌려 이름마저 일선공원이라 지은 120년 전통의 공원을 둘러본다. 이후 팀호환에서 딤섬을 먹고, 타이완 총통의 집무실이 있는 중화민국총통부를 구경한 뒤에 228 평화기념공원에서 여유를 부리고, 대만국립박물관을 한 바퀴 스윽 둘러보며 하루를 정리하는 거다.


단순하지만 알찬 일정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와 함께 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일정이라며, 스스로의 계획력에 흠뻑 취하기까지 했다.


친절한 구글맵의 안내에 따라 MRT를 타고 베이먼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저 유명한 타이완 1급 고적의 흔적을 찾았다. 호옥시이. 저기 저것이 승은문?? 아.. 승은문은 보수공사 중이었다. 그럴 수 있지 뭐.


아주 특별한 공사장 사진을 한 장 찍고, 우리는 계속 걸었다.


눈앞에 펼쳐진 대만의 이국적인 풍경을 보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빠질 만큼 벅찬 행복을 느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노스탤지어를 자극했고, 커다란 고목들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만은 정말 멋진 나라였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걷다 보니 멀고 먼 과거에 본 적 있는 타이베이 메인 역을 만났다. 오랜 과거의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타이베이 메인 역은 여전히 모든 것이 바쁘게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앞다투어 걷고, 대로의 자동차와 오토바이들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쓴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한 시라도 빠르게 출근해야 했고, 어린이집에서 목 빠지게 엄마만을 기다리는 아이를 위해 한 시라도 빠르게 퇴근해야 했던, 그래서 지하철역 앞에서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움직이던 나.


그리고 나를 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아이와 함께 느리게 걷고 있는 지금의 나를.



자유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름답고 시원했다. 그리고 강렬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너무 커서 화들짝 놀라 자빠질 뻔했다. 하마터면 이토록 커다란 행복을 인식하지 못할 뻔했다. 회사를 잠시 떠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가 이렇게까지 가벼워졌다니, 내가 이렇게까지나 여유로워졌다니.


이 글을 빌러 이 행복을 깨닫게 해 준 타이베이 메인 역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계획대로 일선공원에 도착했다. 쑨원이 머무른 적이 있다는 120년이나 된 일본식 여관 매옥부와 멋진 정원으로 꾸며진 곳인데, 실제로 보니 여행 책자의 설명이나 사진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었다.


이른 시간이라서였을까, 방문객은 나와 아이뿐이었다. 자그마한 연못과 멋스러운 정자가 있는 정원을 걷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월요일 오전, 한가롭게 공원의 의자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이 여행이 주는 자유를 실감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라서 아이가 뛰어놀 수 있는 동시에 내가 뭔가를 보고 느끼고 혹은 배울 수 있는 ‘의미를 가진’ 공원을 중심으로 여행 계획에 세웠는데, 일선공원을 이 계획에 넣은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싶었다.


잠시 잠에 들었던 아이가 깨어났고, 아이와 함께 건물 내부를 관람하기로 했다. 내부는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박물관처럼 사진과 편지 등을 포함한 쑨원의 흔적이 가득하다. (쑨원은 중국 본토와 대만, 양국에서 모두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하다. 단군 할아버지도 아닌데 말이지)


배가 고프다며 채근하는 춘향이 덕에 서둘러 일선공원을 빠져나왔다. 춘향이 취향의 점심 식사 후 찾아간 곳은 228평화기념공원.


직접 마주한 228평화기념공원은 정말이지, 진짜, 넓었다. 도시 한가운데 이토록 멋진 초록의 공간이 있다는 건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와 같이 이 도시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큰 축복이다. 넓은 공원에는 예쁜 꽃밭과 다양한 기념비가 있고, 박물관과 놀이터, 공연장까지 갖추고 있다. 중국풍 정자는 유독 눈에 띄었다. 볼거리 놀 거리가 넘쳐났고, 아이는 이곳을 너무도 좋아했다.



중국풍 정자는 사방팔방에서 보아도 멋들어졌다. 사진을 찍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멋진 정자를 배경으로 내 사진도 한 장 남기고 싶었으나.. 주인공 정신 투철한 춘향이는 이를 허락지 않았다. 두고두고 아쉬울 뿐이다.


춘향이에게 엄마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놀이터 타임! 저 멀리 보이는 놀이터를 어찌 보았는지 아이는 빛처럼 빠르게 놀이터를 향해 달려갔고, 그곳에서 열심히 놀았다.


나는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던 아이가 잠시 쉬는 타이밍을 낚아챘다. 아이를 슬슬 꼬셔 228평화기념공원 옆, 중화민국총통부를 구경 가기로 합의 보는데 성공했다.


역시나 위엄 있는 모습의 총통부 건물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건물보다 더 멋지다고 생각한 건 총통부 앞으로 시원하게 뚫린 대로. 타이베이 최고의 랜드마크 101타워까지 막힘없이 쭉 이어진 길을 보고 있으니, 회사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던 내 속까지 시원하게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 시원해라!


묵은 때가 시원하게 벗겨져 나가는 것 같은 그때 아이는 우유를 사러 가자고 했다. ‘분위기 갑자기 우유?’ 아이의 우유 타령으로 주변 편의점을 찾기 시작했고 그 덕에 중화민국총통부 주변 골목 곳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가지런히 주차된 오토바이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목들, 아이를 먼저 배려하는 친절한 시민들. 타이베이의 진짜 시민 문화와 향기를 체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찾아낸 편의점은 어느 대학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는 우유를 골랐고, 나는 밀크티 한 병을 집었다. 젊음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짧은 티타임을 가졌다. 좋더라. 정말.


대학생들의 활기를 더 느끼고 싶었지만 다시 228평화기념공원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의견을 반영하여 우리는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발견한 것은 오리 커플. 말 그대로 새하얀 오리 두 마리가 연못 위를 둥둥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도 하고. (나는 조류를 무서워한다) 화들짝 놀란 나와 달리 아이는 오리가 자기를 좋아해서 자기에게 온다며 신이 났다. (헉) 그러면서도 아이는 조류를 싫어하는 엄마를 보호하겠다며 오리에게 큰 소리를 치더라.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오!”


아이와 나, 어느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아이의 시선은 어느덧 오리 부부가 살고 있는 연못 옆 공연장을 향하고 있었다. 시민 몇몇이 그곳에서 공연 연습을 하는 것이 재미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자연스레 그들의 공연 연습 구경을 위해 우리도 공연장으로 갔다. 아쉽게도 공연 연습은 빠르게 끝나버렸고 텅 빈 공연장을 아쉽게 보던 아이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홀로 공연장 위로 성큼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아이는 대만 228평화기념공원 공연장에서 국악공연을 펼쳤다. 이것이 진정한 버스킹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겠는가! 아이의 공연을 지켜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무엇보다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뻤다.


참으로 참으로 자유로운 날이었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쉬고 싶은 곳에서 쉬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흘려보낸 하루.


나의 취향과 아이의 취향을 조심스레 맞춰가며 우리만의 여행을 만들어가는 이 시간이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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