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도 아이도 모두가 내 편이었다

by 김샤갈



“라우리는 물개처럼 엄마 배 위에서 자는 게 좋아.”

“엄마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

“엄마, 최고 많이 사랑해.”

이렇게 예쁜 말을 하며 아이는 폭신한 내 배 위에 눕곤 한다. 내 배 위에 누운 아이가 숨을 쉴 때마다 내 배도 아이를 따라 오르내린다. 그 움직임은 언제나 재미있다. 이 아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나를 이토록 사랑해 줄까. 나는 매일 아이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잠을 자다가도 아이의 칭얼거림에 일어나 물을 떠다 주고, 밥을 먹다가도 아이의 요청에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분명 불편한 순간들이지만, 그 속에서도 나를 향한 아이의 사랑이 느껴져 아이의 부름이 마냥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차리고, 아이가 말하기 전에 건네주고 싶어진다. 아이에게서 배운 사랑을 두 배쯤 불려 다시 아이에게 돌려주고 싶다. 가끔은 몸의 피곤함이 먼저 고개를 들기도 하지만, 그 마음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아이의 말투 속 작은 변화를 알아차리기 위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이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만큼 오래 눈을 마주친다. 그러다 보면 아이의 마음을 조금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여행 책을 보던 아이가 “엄마, 여기 좀 봐. 진짜 예쁘다. 그렇지?” 라며 가리켰던 팔각형 붉은 벽돌 건물, 시먼 홍루를 그날 여행의 시작으로 정하는 것처럼.


아이와 함께 아이의 눈에도 아름다운 붉은 벽돌 건물 시먼 홍루를 한 바퀴 돌았다. 기대했던 만큼 아이는 이 ‘옛날 건물’을 좋아했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며 작고 작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래된 돌바닥을 밟을 때마다 낮고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 앞에서는 한참을 서서 구경했고, 부드럽고 알록달록한 스카프 가게 앞에서도 또 한참을 머물렀다.


시먼 홍루 밖에는 노천카페와 노천 펍의 흔적이 가득했다. 어두워진 후에야 장사를 시작하는 곳들이라 이른 시간에 방문한 우리는 이용하지 못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아이는 “엄마, 나중에 여기에 오면 저기서 술 마셔. 진짜 멋지겠다.”라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말로 우리의 다음 여행을 기약했다.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건, 역시 아이뿐이로구나.


시먼 홍루를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듯한 건물들 사이를 지나며, 타이베이의 노란 택시는 살짝 빛바랜 이 도시의 색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질서 정연한 도로를 바라보며, 이 도시의 매력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느릿느릿 걷던 우리는 아주 오래전, 일본이 대만을 지배하던 시절에 지어졌다는 건물을 마주했다. 교토에 가면 이 건물과 닮은 건물이 하나 더 있다고 한다. 대만은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 식민지 시절의 흔적을 비교적 많이 보존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그 시간마저 하나의 역사로 남겨두려는 마음이 아닐까.

아픈 시절의 흔적을 공원으로 만들고 정성스럽게 가꾸는 대만의 마음이 궁금해 표지판의 글을 읽으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업무 전화였다. 분명 회사로부터, 일로부터 도망친 여행이었지만 전화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여보세요…”


한숨이 푸욱 나왔다. 그때 아이가 나를 보며 씽긋 웃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집에서 키우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신기하고 재미있다며 또 한 번 킥킥 웃는다. 아이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웃음은 전염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니었나 보다.

아이 덕에 웃는다. 아이 덕에 산다. 아이 덕에 행복하다. 아이에게 고맙다. 정말 많이.


한바탕 웃고 나니 우리는 보피랴오 거리에 도착했다. 내가 좋아하는, 보피랴오 거리. 이곳에 있으면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든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다. 보피랴오 거리는 회사와는 정반대의 속도로 움직인다.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이 거리는, 조금 느린 걸음마저 모두 받아주는 관대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고 보니 보피랴오 거리는 나의 이전 보스를 닮았다. 언제나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인정해 주던 그 보스.

보피랴오 거리를 걷다 보니 힘이 났다. 자신감이 생겼다. 이 거리는, 내 최애 보스처럼 무너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타이베이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도시에서 회사 일로 지친 내 마음이 위로받게 될 줄도 몰랐다.


타이베이의 응원에 힘을 얻어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발길이 닿은 곳은 용산사, 타이베이 시민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그 절. 용산사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관광객만큼이나 일상을 살다 잠시 들러 기도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연기처럼 퍼지는 향 냄새 사이로, 모두의 기도가 차곡차곡 쌓이는 듯했다.

아이는 붉은 두 개의 승부목을 꼭 쥐고, 작게 숨을 고른 뒤 바닥으로 던졌다.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잠시의 침묵을 깨뜨렸다. 아이의 입술이 가만히 움직였다. 짧은 기도 속에는 아이 자신보다 엄마인 나를 향한 바람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아마 여러 날 반복된 나의 기도를, 아이도 들었나 보다.


유모차에 앉아 있던 아이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엄마를 위한 기도가 꽤나 간절하고, 피로했던 모양이다. 자는 모습마저 귀여운 내 사랑, 내 아가.

아이에게 잠깐의 휴식을 허락할 겸 중산당에 들러,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필요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아이가 자는 동안 오전에 연락받았던 업무를 처리하고, 실타래처럼 얽힌 일을 풀 방법을 고민했다. 쉽지 않은 고민이었지만, 일터를 벗어나 있어서인지, 아이의 사랑 덕분인지 전처럼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잠에서 깬 아이는 눈을 비비더니 곧바로 말했다.

“이제 공룡 박물관 가자.”

아이가 말한 공룡 박물관은 대만 국립 박물관이었다. 아이가 가고 싶다는데, 가야지. 우리는 곧장 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여행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보고 싶은 것을 보러 가는 것. 어쩌면 그 단순함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립 대만 박물관에 들어서자 아이의 걸음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커다란 뼈 앞에서 아이는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아는 공룡 이름을 하나씩 불러댔다. 물론, 내가 아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오 마이 갓.

나는 설명문을 읽는 대신 아이의 표정을 읽었다. 그 덕분에 박물관 투어는 훨씬 재미있어졌다. 아이의 얼굴에는 걱정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온몸으로 좋아하는 마음만 있었다. 박물관을 걷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보고, 함께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였다.


국립 대만 박물관은 아이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고, 나에게는 아이와 이 도시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주는 시간이었다. 박물관을 나설 즈음, 아이는 하루치 웃음을 다 써버린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오늘 하루를 충분히 잘 살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이에게서는 사랑을, 도시에서는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그 감사한 마음을 다시 아이에게로 돌려주었다. 타이베이는 나를 쉬게 했고, 아이는 나를 다시 걷게 했다. 여행 덕에 내 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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