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랑 엄마랑 호캉스

by 김샤갈



매일같이 걷고, 보고, 느끼는 추억이 쌓여갈수록 아이도 나도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아이의 컨디션이 부쩍 흔들리던 날, 나는 과감하게 쉬어가는 날을 선포했다. 2주간의 여행 중 하루쯤은 ‘어디로 갈지’보다 ‘어떻게 쉴지’를 먼저 생각하며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행도 삶과 닮아 있으니까.


아침 식사 후 룸으로 돌아온 아이와 나는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뒹굴었다. 아이는 호텔 이불이 집 이불보다 훨씬 폭신하다며 얼굴을 파묻었고,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괜히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 시간이 얼마 만이던가. 집 나갔던 여유가 슬그머니 돌아온 기분이었다.


하우스키퍼가 룸 정리를 해도 되겠냐며 벨을 누르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다닥 수영복과 수영용품을 챙겨 호텔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아이에게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늘 수영장이었다. 관광지는 기억에서 희미해져도, 수영장에서 놀던 기억은 오래 남는다는 걸 몇 차례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아이는 수영장이라면 한곳에서 하루 종일이라도 놀 수 있을 것처럼 웃었다.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사우나에서 온천욕을 즐긴 뒤 방으로 돌아오니, 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로 이불 속을 파고들더니 말 한마디 없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잠에 빠진 아이의 얼굴은 천사처럼 고요했다.


아이가 잠든 사이 노트북을 켜 급한 업무를 처리했다. 여행까지 와서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꿈틀거릴 때, 재빨리 시선을 옮겨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이 긴 시간에 감사해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잠에서 깬 아이와 또 한참을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그러다 바람이라도 쐬자며 이케아로 향했다. 특별히 살 물건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눈요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이는 자기 방에 놓고 싶다며 작은 의자를 살펴보았고, 화려한 커튼들을 둘러보았다. 신기하게도 나는 이케아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낯선 도시 한가운데서 만난 익숙한 공간은, 여행자였던 나를 잠시 일상으로 데려다주는 듯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아이는 “오늘은 아주 특별한 하루였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거나, 특별한 걸 보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풍경 따위가 아니었던 것처럼.


아이를 재우고 난 뒤,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 한 캔을 땄다. “챠악.” 그 소리가 경쾌했다. 맥주 한 캔을 옆에 두고 아끼는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리고 꽤 괜찮은 하루를 보냈다는 일기를 썼다. 창밖의 타이베이 야경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은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여행도, 그리고 우리네 인생도 꼭 채워야 할 날이 있는 것처럼, 비워야 하는 날도 있다는 사실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그 자체로 충분한 하루가 있다는 것을. 별다른 특별한 활동 없이 그저 존재하기만 했던 “호캉스 하루”가 두고두고 기억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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