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컨디션이 바닥을 찍었다. 여행 내내 아이를 배려하고 최우선으로 두었음에도, 네 살 아이에게는 이 여행이 퍽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아이에게 한국에서 챙겨 온 약을 먹이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았다. 평소라면 한국에 두고 온(?) 업무에 오전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할애했겠지만, 그마저도 다음의 언젠가로 미루고 아이 곁을 지켰다.
얼마나 누워있었을까. 약 기운이 돌기 시작했는지 힘없이 축 처져 있던 아이가 갑자기 수영장에 가고 싶다며 수영장에 갈 채비를 했다. 컨디션이 저조한 아이를 물가에 보내는 것이 영 마음 내키진 않았지만, 그보단 아이를 향한 안쓰러움이 더 커서 못 이기는 척 아이를 따라나섰다.
약을 한 번 먹었다고 건강이 회복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제아무리 따뜻한 나라 대만이라도, 어쩔 수 없는 북반구 아닌가. 크리스마스 시즌은 겨울이다. 겨울. 미적지근한 온도의 물에서 십여 분을 놀았을까. 아이의 입술이 푸르스름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아이를 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
마른 수건으로 아이를 돌돌 말고, 룸으로 돌아가자는 설득을 시작했다. 물놀이를 한 시간만큼 설득을 하고 나서야 겨우 아이의 오케이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회사 일보다 힘든 일이 엄마 일이로구나.
룸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마주친 하우스키퍼는 아이에게 풍선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엘사와 똑같이 생긴 엘사 풍선을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너무도 좋아하는, 바로 그 엘사였다. 수영장에서 오래 놀지 못해 뾰로통해 있던 아이의 기분은 순식간에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신남으로 바뀌었다.
몸이 아픈 아이를 마음까지 아프게 한 것 같아 계속 마음에 걸리던 터였다. 그래서였는지 하우스키퍼가 너무도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정말로.
엘사 풍선을 품에 안은 아이는 룸에서도 한참을 엘사 풍선과 놀았다. 참 다행이다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보니, 아이는 소리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아이를 안아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잠든 아이 옆에 나도 누웠다. 회사가 싫다며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 그토록 원하던 대로 업무에서 멀어진 날들을 보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행복에 겨워 있어야 하는데, 행복은커녕 아픈 아이를 보며 아이만큼 아파하고 있었다.
문득 행복이란 무엇인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나의 뒤척임이 아이의 신경을 거슬렀는지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마음도 편치 않은 듯했다. 평소보다 짜증을 많이 냈고 울음을 보이기도 했다.
룸에만 있어서 답답한 것일까 싶어 아이를 안고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호텔 로비의 바 겸 카페에서 아이가 먹고 싶다는 피자도 먹었다. 그 후 약을 먹는 아이는 또 잠에 빠졌다.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보슬보슬,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예쁜 비였다. 갑자기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그 비를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일어나면 잠깐 나갔다 와야지.’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아이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고민 끝에 이불로 아이를 둘둘 말아 유모차에 눕혔다. 유모차에는 방수 방풍 커버를 야무지게 씌웠다. 그러고는 유모차를 밀고 호텔 근처에 있는 미니어처 박물관, 수진 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수진 박물관에는 예쁜 인형들이 많았다. 예쁜 인형의 집은 더 많았다. 신데렐라, 피노키오, 백설공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걸리버의 여행기까지. 아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테마로 한 작품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진 박물관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베네치아, 포로 로마노, 그리고 버킹궁의 미니어처까지 볼 수 있었다.
어쩜 이렇게 작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귀여운 작품들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바로 뒤따랐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박물관에서는 이 작품들을 소장할 수 있도록 판매하는 스토어도 운영하고 있었다. 역시 자본주의 생태계. ㅋㅋ.
난 누구보다 멋진 자세와 표정으로 스토어를 지나쳤다. 빈손으로 스토어를 빠져나왔다. 그렇다. 내가 나를 이긴 것이다.
밖에는 여전히 예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아이와 나는 우리가 함께 본 미니어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의 컨디션은 회복되고 있었고, 그래서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지고 있었다. 그 길에서 나는 문득 ‘지금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토록 싫었던 회사로 돌아가더라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누군가와 마주하는 순간에도 가까운 곳에 숨어있는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가 생겼다. 작긴 하지만 분명한 자신감도 함께였다.
행복.
이런, 파랑새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