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만 자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 참 무섭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이런저런 바람들이 움튼다. 아이가 글을 조금 빨리 깨우쳤으면, 책을 좋아했으면, 운동을 잘했으면, 그리고 엄마보다는 영어를 더 잘했으면 하는 꿈이 서서히 고개를 든다.
지난 3년 동안 나는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아이를 학구적으로 키워보려 애썼지만, 나의 딸은 '노는 게 제일 좋은' 아이로 자랐다. 아이에게 영어로 말을 걸거나, 책을 영어로 바꿔서 읽기라도 하면, "엄마, 여긴 한국이니까 한국말을 해야지!"라고 아주 큰 목소리로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곤 했다.
평양 감사도 제가 싫다면 어쩔 수 없다고, 아이가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초심을 다잡으며 아이가 신나게 놀면서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바라'는 엄마가 되자고,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해왔다.
그런 마음으로 여행 중에도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고, 그렇게 찾아간 곳이 타이베이 동물원이었다. 먼저 다녀간 이들의 말에 따르면, 타이베이 동물원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동물원으로, 아이들이 하루 종일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노는 게 제일 좋은 우리 딸에게 이곳은 더없이 완벽한 여행지임이 분명했다.
아이의 동물원 투어를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게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 매일같이 일기예보를 확인하며 여행 일정 중 가장 날씨가 좋은 날을 골랐다. 그렇게 우리는 타이베이 여행 중 '날씨가 가장 좋다고 하는 날', 손에 손을 잡고 타이베이 동물원으로 향했다.
타이베이 동물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찾아간 곳은 "꼬마 동물원"이었다. 오리, 닭, 돼지, 말 등 과거 집에서 키웠을 법한 동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동물들을 만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공간이었고, 동물이 마냥 좋은 아이 입장에서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곳이었다.
전에 없던 경험을 한 아이는 한껏 신이 나 이곳저곳을 달려 다니기 시작했다. "오리야! 이리 와봐!" "말아, 이거 먹어봐!" 동물에게 먹이 주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터라 눈치가 보이기도 했지만, 말은 아이가 내미는 건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이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도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묘하게 안도가 되기도 했다.
코알라관을 발견한 아이는 언제 말에게 매달려 건초로 유혹했냐는 듯 태도를 바꿔 당장 코알라를 만나러 가자고 재촉했다. 아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코알라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쉼 없이 늘어놓았다. "코알라는 잠을 아주 많이 자." "코알라는 손톱을 딱! 세워서 나무 위로 올라가는 거야." "코알라는..." 나보다 아는 것이 더 많은 아이를 보며 혹시 내 딸이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다. 뭐 아주 잠시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는 얘기다. 하하.
열심히 코알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딸이 잠시 숨을 고르는 틈을 타, 나는 코알라관 설명 판에 적힌 정보 하나를 슬쩍 던졌다. "코알라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한대. 코알라 아가가 너무 어려서 엄마와 함께 있어야 할 때를 제외하면 코알라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대. 그래서 나무 하나에 코알라 한 마리만 있는 거래." 내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는 "진짜 그러네. 어떻게 알았어?"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엄마는 다 알지.'라고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설명판에 영어로 적혀 있다고 이실직고했다. 그때, 아이는 말 그대로 "처음으로" 나에게 영어를 읽어달라는 요구를 했다. 물론 곧바로 "그러니까 그 말을 다시 대한민국 말로 해줘."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내가 던진 미끼를 아이가 문 셈이라며 혼자 속으로 꽤 많이 웃었다.
미끼를 문 아이를 보며 흐뭇해진 덕일까? 아이만큼이나 내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걸음으로 우리는 타이베이 동물원의 최고 인기 스타, 판다를 만나러 갔다.
판다의 인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판다를 좋아한다지만, 판다를 향한 아이들의 사랑은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판다를 보기 위해 모인 아이들이 어찌나 많던지, 동물원의 모든 어린이가 판다관에 모여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독 또래의 친구들을 좋아하는 우리 딸은 주변에 친구가 많아지니 기분이 한층 더 좋아 보였다. 커다란 판다의 작은 움직임에도 크게 감동하던 아이가 갑자기 시무룩해지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아이는 친구들에게 말을 걸지 못해, 그 마음을 혼자 삼키고 있었던 거였다.
어떻게 하면 속상한 마음이 옅어질 것 같냐는 내 질문에 아이는 솜사탕을 먹으면 속상한 마음이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을 것 같다고 답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의 예쁜 대답에 엄마 마음이 사르르 녹아 아이 손에 알록달록 예쁜 솜사탕을 쥐여 주었다.
솜사탕을 사는 내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던 아이는 두 손에 솜사탕을 꼭 쥔 채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근데 아까 솜사탕 살 때 왜 영어로 말했어?” 대만은 중국어를 쓰는데, 엄마는 중국어를 배우지 못해서 영어로 말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영어를 알면, 다른 나라에서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에게는 솜사탕을 맛볼 시간을, 나에게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선물하기 위해 가까운 쉼터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우리가 앉아있던 테이블에 한 가족이 함께 앉았다. 우리 딸과 비슷한 또래의 두 딸이 있는 가족이었다.
뜬금없이 그 집의 큰아이가 내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과 주스를 자랑했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아이는 달달한 맛을, 나는 새콤한 맛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의 엄마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맛이 다를 수 있다고 아이에게 말해 주었다.
그제야 알았다. 그들은 중국계 미국인이었고, 아이가 쓰는 영어는 배운 말이 아니라 익숙한 언어라는 것을.
국적도 언어도 다른 두 아이가 서로에게 보내는 눈빛이 느껴졌다. 우리 딸과 미국인 가족의 첫째 딸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함께 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우리 딸이 입고 있는 엘사 드레스를 보더니 그 아이는 자신의 “엘사가 그려진” 모자를 보여주었고, 우리 딸에게 조용히 간식을 나눠주었다. 우리 딸은 이에 답이라도 하듯 솜사탕을 친구에게 건넸다.
두 아이는 쑥스러운 듯 숨었다가 궁금한 듯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함께 놀았다.
그렇게 간식 시간을 마치고 미국인 가족과 굿바이 인사를 나누고 돌아설 때, 아이는 갑자기 “엄마 나도 영어로 말을 하고 싶어.”라는 말을 했다. 오 마이 갓.
아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까 친구랑 놀 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못해서 마음이 아팠어. 이제 영어 공부할래. 그래서 다음에 또 여기 오면 친구랑 더 재미있게 놀 거야.”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작은 약속을 했다. 집에 돌아가면 매일 조금씩 영어 공부를 해 보자고, 어려운 건 말고 인사하는 말부터 천천히 해 보자고. 아이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 나 진짜 열심히 할 거야. 다음에 친구 만나면 꼭 말 걸고 싶어.” 나는 아이의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엄마가 먼저 같이 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공부는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필요를 느껴야 한다는 것을. 아이에게 영어는 더 이상 엄마가 권하는 어떤 과제가 아니라, 친구에게 말을 건네기 위한 가장 솔직한 마음이 되었다.
하루 종일 동물원을 걸어 다니느라 몸은 제법 피곤했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저녁 수영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짧게나마 수영을 하고 돌아와, 잠든 아이를 옆에 두고 남편과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며 하루를 정리했다.
타이베이 동물원에 가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걸, 아이가 몸으로 배운 날. 나에게도 오래 남을, 아주 특별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