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너에게 배운 것 2
아이야.
어릴 때 좋아하는 일에 몰입해 본 경험이 있지.
엄마는 여러 번 그런 너의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단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넌 ‘마법천자문’ 만화책을 많이 보았지. 그것을 읽기만 한 건 아니었어. 네가 그 만화책을 보는 이유는 엄마에게, 아빠에게, 그리고 친구들을 ‘공격’하는데 써 먹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손바닥을 펴서 엄마에게 장풍을 보내듯 ‘물 수(水)!’ 외치더니 “엄마는 이제 물 속에 있어!” 그러더라. ㅎㅎ 양 팔을 펼치고 ‘날 비(飛)!’를 외치며 엄마에게 날아오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붉을 홍(紅)!’ 외치더니 엄마를 빨갛게 만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네? 대체 왜 엄마를 빨갛게?) 매일 매일 이어지는 너의 계속되는 한자 공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ㅋㅋㅋ
한글도 다 떼지 못했는데 만화책을 보는 게 신기했어. 한글도 모르는데 한자는 외워 읽는 것도 신기했어.
무엇보다도 네 몰입의 최고봉은 ‘큐브’였어.
네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 공동육아방과후에서 언니, 오빠들이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사 달라고 하더니 매일 주머니에 큐브를 넣고 다니면서 밤이고 낮이고 큐브를 맞추더라. 처음엔 언니, 오빠들에게 배우고 설명서도 보면서 노는 것 같았어. 어느 날 방과후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숙제만 끝내고 나면 내내 큐브만 돌리고 있다고. 너무 재밌는 모양이라고. 완전 몰입해 있다고. 엄마가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밥 먹는 시간 말고는 내내 큐브에 몰입. 정말 무섭게 빠져 있었어. 몇 달은 그랬던 것 같아. 6면을 모두 맞췄을 때 어찌나 기뻐하던지. 완성을 경험한 이후엔 엄마에게 마음대로 섞으라 하고 6면을 완성하고 뿌듯해 한 시간도 여러 번이었어.
아이야.
너는 정말 큐브에 ‘미쳐’ 있었어.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몰입’한 너의 모습을 감탄하며 지켜보았어. 대단한 집중(concentration)이고 대단한 '몰두(immersion), ‘몰입(flow)’이었어.
네가 그렇게 몰입했을 때 너는 다른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을 정도로 네가 하고 있는 일에만 푹 빠져 있었어. 그 행위 자체를 너무나 즐겁게 반복하고 있었어. 사실 6면을 모두 맞추기까지는 꽤 인내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을 거야. 처음엔 한 면만 겨우 맞추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지. 그게 능숙해지니까 이번엔 한 면을 둘러싼 한 층을 완성하더라. 그리고 나서 또 한 층을 쌓고. 그렇게 반복 또 반복하더니 어느 날 6면을 완성해 냈지.
몰입은 그런 거래. 사람들이 다른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상태. "immersion". 이 단어는 라틴어 immersionem에서 유래했고 무려 1500년 경부터 사용되었어. im은 in의 변형. '안에' 라는 뜻이고 mergere는 "빠지다, 담그다"라는 뜻이래. 어떤 것의 안에 푹 빠져 있는 상태. 이런 경험 자체가 너무나 즐겁기 때문에 이 상태를 지속하기 위하여 어지간한 고생도 감내하면서 그 행위를 하게 되는 상태(주1).
네가 바로 그런 상태였어. 엄마는 너의 모습을 보면서 ‘아 저게 바로 몰입이구나’ 너무나 명확하게 알 수 있었어.
엄마는 너를 통해 몰입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도 알게 되었어. 엄마도 몰입한 순간이 있지만 그 시기에 엄마의 그런 모습을 엄마 스스로 관찰하지는 못했었거든.
너는 한 단계 한 단계 완성될 때마다 진심으로 기뻐했어. 기뻐서 신나서 엄마에게 뛰어왔어. 네가 해냈다는 기쁨을 엄마와 함께 나누려고 말이지. 네가 한 단계 한 단계 해 나갈 때, 그리고 엄마에게 뛰어와 네가 무엇을 해냈는지, 네가 그래서 얼마나 기쁜지 전할 때 엄마도 행복하고 기뻤단다.
아이야.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행복은 우연히 찾아오지 않는다.”(주1)고 했어. 행복은 운이 좋아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쩌나 생긴 기회의 산물도 아니래. 돈이나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래. 행복은 “직접적으로 찾을 때가 아니라 좋든 싫든 간에 우리가 인생의 순간순간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을 때에만 찾아온다.”고 해(주2). 엄마는 너를 통해 그것을 보았어. 저렇게 몰입했을 땐 몇 달이 걸리는 과정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구나. 저렇게 몰입했을 땐 힘든 과정을 거치는 것도 하나도 힘들지 않구나. 몰입해 있는 시간 자체가 바로 행복한 순간이구나. 아, 몰입 자체가 곧 행복이구나...
아이야.
그렇게 몰입해 있을 때 너에게 걱정과 두려움 따윈 전혀 없었어.
내가 이것을 해낼 수 있을까, 해낼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어. 그냥 즐기고 그냥 빠져 있었을 뿐이었어. 몰입은 걱정도 두려움도 없는 상태라는 걸 엄마는 너를 보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어. 워낙 유명한 말이라 너도 들어봤을 거야.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고 즐기는 자는 미치는 자를 이길 수 없다.” 공자님 말씀도 널 보면서 이해가 되었지.
네가 큐브를 그렇게 한 단계씩 맞추어가던 그 순간. 너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어.
엄마는 큐브를 한 면 밖에 맞추지 못해. 처음 한 면은 엄마가 가르쳐줄 수 있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다 네가 혼자 한 거였어. 그 순간 너에게 엄마는 필요 없었지. 너는 너만의 세상에서 그걸 즐기고 있었지. 너는 너만의 세상에서 큐브에 ‘미쳐’ 있었지. 엄마는 너를 보면서 저렇게 몰입하면 될까, 안 될까 그런 고민 따윈 없는 거구나. 저렇게 몰입하면 걱정도 없는 거구나. 저렇게 몰두하면 두려움도 없는 거구나.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어.
엄마가 너의 몰입을 통해서 본 게 또 하나 있어. 그건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거야. 그렇게 몰입한 순간에 너에겐 시간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어. 밥 먹으러 오라는데 벌써 밥 먹을 시간이냐고 하더라. 빨리 씻고 자야 하는데 벌써 9시냐고 하더라. 넌 큐브만 잡고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했어.
엄마는 너의 몰입을 보면서 ‘시간’이 얼마나 마법 같은지도 생각하게 되었어. 어떤 땐 너무나 빠르게 느껴지고 어떤 땐 너무나 느리게도 느껴지니까. 같은 한 시간도 각자에게 서로 다른 한 시간이니까.
엄마는 어떤 때 그렇게 빠른 시간을 느끼는지도 다시 떠올려 보게 되었어.
사실 요즘 엄마는 3년 전에 중단했다가 네 덕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어. 논문써야 하는 시기에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엄마도 꽤 몰입한 것 같긴 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순간에는 정말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어느 새 시계를 보면 2시간이 지나 있어. 그 순간 만큼은 몰입한 게 맞겠지.
하지만 엄마는 너처럼 과정 자체에 푹 빠져 있지 않은 것 같아. 스스로에게 약속해 놓고 부담으로 느낄 때도 많아. 주말에 12시간 일터의 행사를 마치고 잠 안 자고 글 쓰고 있는 게 힘들기도 했어. 직장 동료들과 회식하고 3시간 자고 벌떡 일어나 글 쓰는 게 힘들어서 충분하게 해내지는 못했어. 엄마도 계속 쓰다 보면 너처럼 조금 더 긴 시간 몰입할 수 있는 순간이 오겠지?
아이야.
엄마는 너를 통해 ‘몰입’을, 살아 있는 ‘몰입’을 배웠어. 행복도 배우고 두려움도 배웠지.
그리고 '시간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어.
너도 이제는 어른이 되었지. 아이야. 어른이 되어도 현실적인 고민 때문에 이런 몰입의 순간들을 잃어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아이야. 고맙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주3).
※ 주1, 주2: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2004, 한울림.
※ 주3: 미하엘 엔데, 《모모》, 2015, 비룡소.
※ 표지 이미지: pixabay.
지담님이 이 글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숨은 큐브의 달인, 여기에 있었군요^^
유전자는 어디서 왔을까요?
곧 누리실 작가님의 몰입의 기쁨을 위해, 저도 응원드려요!!!
집중과 몰입 유전자는 저보다는 아빠 유전자 같습니다 ㅎㅎㅎ 저는 그리 몰입했던 때, 몰입했던 일이 무엇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ㅋ 응원 감사해요 모카레몬님! ^^
맞아요.
물리적인 시간은 중요치 않아요.
절대치가 아니라 나 스스로 시간이 날 구속할 수 없게
내가 시간을 통제하는 능력.
시간조차도 나를 훼방놓을 수 없게 하는 능력!!!
캬~~~ 몰입이죠...^^
감사히 읽었습니다! 작가님!!!!!!
아이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저는? 이 질문만 던지면 왠지 작아지는 저를 발견합니다. 매일 매일 하다 보면 된다는 지담 작가님 말씀 따라 조금 더 걸어봐야겠지요. 저는 이제 막 시작했으니까요 ^^
늘 공감과 응원으로 함께 해 주셔서 넘넘 고맙습니다 지담 작가님!!!!!
몰입의 환희를 보여준 아이에게 우린 자주 인생이 감추어둔 진실을 배웁니다.^^
몰입하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는 놀라움.
내가 몰입하고 있을때 모든 것이 정지되는 찰나!!!!
다 너무 좋은 것이네요.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단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아이 보면서 계속 배워가야 하나 봐요. 아이가 있어 그나마 조금씩 나아질 수 있으니 인생의 큰 행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