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너에게 배운 것 1
아이야.
엄마는 너에게 배운 것이 참 많아.
아마 학교에서보다도, 직장에서보다도 너에게 배운 것이 더 많을 거야.
이제 그 이야기를 하나씩 해 보려고 해.
아이야.
네가 한글도 다 떼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거 기억나니?
네가 다녔던 어린이집은 아이들에게 인지 교육을 시키지 않는 곳이었고, 덕분에(?) 너는 8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도 여전히 한글을 데지 못하고 있었어. 어느 날, 엄마가 물었지.
“너는 한글 못 읽어도 안 답답해?”
“어. 안 답답해. 수진이(주1)한테 물어보면 다 읽어줘!”
그리고 넌 해맑은 표정으로 덧붙였어.
“근데 엄마! 시계는 친구들이 다 나한테 물어봐!”
그때 엄마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 그리고 너무나 부끄러웠어.
아이마다 타고난 것이 다르다고, 재능도 성격도 색깔도 다 다르다고, 입으로는 그렇게 떠들고 다녔으면서 정작 엄마는 조바심이 났던 거야. 엄마는 말과 행동이 달랐던 거야. 그리고 찬찬히, 다시, 너희들을 바라보았어.
이제야 너희들 한 명 한 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한글을 줄줄 읽던 수진이,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던 희주, 뒤로 줄넘기를 하던 ‘태릉인’ 민우. 그리고 시계를 보는 너. 그게 너만의 특별하고 고유한 특성 중 하나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어. 그제서야 네가 훨씬 어릴 때부터 숫자를 좋아하고 차만 타면 숫자 세는 게 취미였던 게 떠올랐어.
그러고 보니 너에게는 우월감도 열등감도 보이지 않았어. 친구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 그저 수진이는 글씨를 잘 읽고, 희주는 노래를 잘 하고, 민우는 줄넘기를 잘 하고, 나는 시계를 잘 본다고 생각하더라고. 넌 시계를 볼 줄 안다고 잘난 척하지도 않았고 한글을 모른다고 위축되지도 않았어. 한글은 한글을 잘 아는 친구에게 물어보고 또 시간을 묻는 친구에게는 네가 시간을 알려 주고. 각자 잘 하는 것으로 다른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서로 비교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던 너희들의 모습이 어른들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너는 결국 한글을 다 읽지 못하고 학교에 입학했어.
네가 한글 모른다고 주눅 들지 않으니 엄마도 주눅 들지 않기로 했어. 그래야 너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거든.
초등학교 입학 후 1학년 담임 선생님과의 첫 상담 때, 아이에게 아직 글자도 숫자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어. 아이가 모르는 것을 학교에서 하나씩 배워갔으면 좋겠다고, 배우는 즐거움을 알아갔으면 한다고 잘 가르쳐 주십사 진심으로 부탁을 드렸어. 선생님은 학교에 와서 즐겁게 배우는 아이가 드물다며 잘 가르치시겠다고 답해 주셨지. 퇴임을 앞둔 신경질적인 선생님이라는 소문에, 귀찮아하거나 노여워할 수도 있겠다, 각오를 했었는데, 다 소문일 뿐이었고 다 엄마 선입견일 뿐이었어. 너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한글과 숫자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재미있게 배웠지. 그제야 억지로 가르치지 않길 잘했다, 안도가 찾아왔어.
아이야. 정말 고맙다.
엄마는 네 덕분에 사람 한 명 한 명이 가진 '고유성'을 알아보기 시작했어. 사람 하나하나가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빛이 나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어. 너는 엄마가 몰랐던 세상을 가르쳐 주었단다.
‘고.유.성.(固有性, uniqueness)’
그것은 본래부터 너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래.
네 안에 굳건하게 존재하는 것이래.
세상에 오직 하나 뿐(Only One)이라서, 독특할 수밖에 없고, 탁월할 수밖에 없고, 유일할 수밖에 없대.
너는 그런 고유성을 가진 존재더구나.
남아메리카 대륙의 아마존 알지? 그곳은 지구 넓이의 약 1%밖에 되지 않아. 그런데 지구 산소의 20%를 만들어내지. 지구 생물종 중 자그마치 1/3이 여기에 살고 있어. 그래서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라고 불려.
네 내면의 깊은 곳에서 허파와 같이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부모도, 학교도, 세상도 알려주지 않는 본성적인 야생의 고유성이 있다고,
단 1%에 불과할지라도 너라는 지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네가 이미 가지고 태어난, 그 누구와도 다른 유일무이한 고유성이 있다고,
너에게 배운 것을 다시 너에게 들려 주고 싶다.
아이야.
너라는 ‘지구’의 깊은 심연에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야생의 아마존’이 감추어져 있어.
한 교육학자는 이것을 ‘내면의 야성(inner wildness)’이라 했어. ‘스스로 되고자 하는 존재로 성장하도록 에너지와 힘을 주는 불꽃.’(주2) 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아마존이 생물과 자연과 지구 자체를 살아 숨 쉬게 하듯이, 네 안의 ‘아마존’이 너를 살아 숨 쉬게 해줄 거야.
이제 스무 살.
남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시기라고들 해.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걸 거야. 그것이 너를 '진짜 너'로 만들어줄 거야. 아이야, 진짜 너를 찾아 너만의 여행을 떠날 준비 됐지?
주1> 아이들의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 이름은 모두 가명 처리하였음.
주2>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길들여지는 아이들》, 2014, 민들레.
표지 이미지> Image by Jan Vašek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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