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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끝까지 친구를 지켰어

너에게 배운 것 8

by 아라

아이야.

엄마가 네 친구로 인해 큰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어. 너도 기억하지?

네가 초등학교 5학년 가을쯤이었어. 너는 공동육아방과후에도 다녔지만 가끔 혼자 집에 있는 시간, 학교 친구들과 노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었어. 학교 친구들과도 즐거운 우정을 나누고 있었겠지.


그러던 어느 날, 네가 속상한 일이 생겼다고 얘기를 했어.

네가 용돈을 모아 두는 파란색 손바닥만 한 틴 금고가 안 보인다고 했어. 늘 같은 곳,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넣어 두는데 없어졌다고. 금고에는 네가 원래 하기로 되어 있는 집안일 외에, 가족 모두를 위한 집안일을 할 때마다 500원씩 벌어 모은 돈이 5만 원쯤 있었다고 했어. 10개월 정도를 모은 돈이라 무척 속상해했지. 엄마는 밖으로 가지고 나간 적이 없으니까 어디서 나올 거라고, 잘 찾아보자고 했어.


이후 새로 받은 용돈은 지갑에 다시 모아 두기 시작했지. 엄마, 아빠와 함께 어디에 두었는지도 잘 기억해 두었고. 그런데 그것도 그 다음 주에 없어졌다고 했고 며칠 뒤 넣을 곳이 없어 봉투에 넣어 두었던 현금도 같은 자리에서 사라졌지.


세 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물건이 사라지는 일이 생긴 후 엄마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우리 집에는 엄마가 없는 시간에도 가끔 너의 친구들이 드나들곤 했으니 혹시나, 하는 생각과 의심. 그리고 조심스럽게 너에게 물었지.


"하늘(별명)아, 엄마가 처음엔 네가 어디 다른 곳에 두고 기억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아닌 것 같거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그동안 우리 집에 왔다 간 친구들 기억나니?"


엄마 혼자 조용히 의심하고 있었는데 3번째 사라진 그날은 너도 말했지.


"엄마, 그러면 안 되는 거 같은데 이젠 나도 친구를 의심하게 돼. 사실은 OO이가 어제 나도 너랑 똑같은 금고가 생겼다고 얘기했거든."


물증은 없지만, 너랑 엄마는 같은 아이를 떠올리고 있었어. 그 친구는 다른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전학 온 친구라고 했어.


엄마는 사실 정말 얄팍한 마음이 들었어. 당장 불러서 자백이라도 받아내 보고 싶었고 그 친구가 더 이상 우리집에 안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어. 너와 며칠에 걸쳐 긴 대화를 하며 마음도 이야기했지. 이리저리 해결책도 모색해 보는 시간이었어. 마지막으로 너에게 물었을 때 너는 분명하게 엄마에게 얘기했어.


"엄마. 오랫동안 모은 용돈 잃어버린 것도 너무 속상하고 그 친구를 의심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너무 속상해. 근데 돈은 잃어버리면 다시 벌면 돼. 그래도 친구는 안 잃어버리고 싶어. 의심을 하는 거지 확실한 것도 아니고."


너의 대답으로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해졌어. 너는 친구를 지키고 싶어했어. 우린 그 친구에게 더 이상 의심의 화살을 겨눌 수 없었지. 그 부분은 모두 빼고 더 이상 집에서 이런 일이 안 생기게 할 방법만을 찾아야했어. 결국 우리는 우리집 대문 안쪽에 작은 메모지에 공지 하나를 붙이기로 했지. 썼다 지웠다 몇 번을 고치고 나서 대략 이런 내용이 완성되었던 것 같다.


- 우리 집에는 도둑을 방지하기 위한 CCTV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촬영되고 있으니 주의하세요.
- 우리 집에서 어린이용 금고와 지갑이 없어졌습니다. 금고와 지갑을 먹는 블랙홀이 있으니 주의하세요.
- 혹시 금고와 지갑을 깜박 잊고 가져가신 분들 계시면 갖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금고와 지갑이 돌아오는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하지만 다행히 메모를 붙인 뒤에 더 이상 물건이 없어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지. 너는 결국 집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친구는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거였어. 이런 방법도 있더라고.


아이야.

엄마는 그때 너에게 사람에 대한 깊은 마음을 배웠어.

엄마가 너였다면 친구를 잃더라도 내 것을 잃은 억울함을 푸는 게 중요했을지도 모르겠어. 시시비비를 가리고 친구의 잘못을 지적했을지도 모르겠다. 의심을 쉽게 확증으로 바꾸고 친구와의 관계를 끊었을 지도 몰라.


엄마로서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너를 보호하고 그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어른의 명분을 핑계 삼아 엄마의 이기적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뻔했다. 네가 그 시기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엄마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여전히 좋았던 친구, 그리고 그 관계를 위해 친구의 실수를 눈감아 주었던 너의 마음은 분명 엄마의 마음보다 큰 것이었어. 네 덕분에 엄마도 때로는 다른 이의 순간의 실수를 눈감아 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 사람을 머리 말고 마음으로 대하는 방법을 조금 배운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와서 엄마는 그 아이 입장이 어땠을까 떠올려 본다.


다른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전학 온 아이.

좋은 친구가 생겨서 안도하고 좋아했을 아이.

어느 날 좋아하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가 보여주었던 용돈이 든 파란 금고를 가지고 와 버렸다.

어떡하지?


얼마나 불안했을까, 얼마나 걱정됐을까.

들통날까 봐 불안하지 않았을까.

친구를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았을까.

많은 친구들이 알게 될까 봐, 그래서 또 따돌림을 당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을까.

순간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가져온 자기 자신을 미워했을지도 몰라.


엄마는 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사람인데 네 덕분에 그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떠올려 본다.

지금도 무엇이 정답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그 아이의 마음까지 떠올려 보면서 네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보게 되었어.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하지 않는 마음을 발견했어.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했든 너는 너의 기분이 아니라 너만의 기준과 태도로 상대를 대한다는 것을 발견했어. 그 상황에 매몰되기보다는 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을 발견했어. 그리고 엄마도 너의 그 마음, 너의 그 태도를 배우고 싶어졌어.


아이야.

네가 고등학생이 되어 한 친구의 ‘도움 친구’가 되었을 때 네가 한 말도 생각난다.

“엄마, 선생님이 '도움 친구' 맡아줄 수 있냐고 물으셔서 그런다고 했어."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네가 대답했어.

"엄마, 나는 그냥 친구가 되려고."


너는 네가 일방적인 도움을 주는 위치에 서겠다고 하지 않았지. 그 아이 옆에 나란히 서는 친구가 되겠다고 했어. 너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얘기했으면 늘 그렇듯 너는 분명히 '고슴도치 엄마'라서 그렇다고 했을 거야 ㅎㅎㅎ) 엄마는 사실 그때도 감동했단다. 엄마는 상대를 돕는다는 것이 상대적 우위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행위에 머물게 된다면 차라리 돕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 도움을 청하지 않는 사람에게 가는 도움은 일방적인 행위가 되기 쉽거든. 도움과 간섭은 종이 한 장 차이거든. 나중에 담임 선생님께 그 아이가 너를 선택한 거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뭉클한 마음이 들었어.


아이야.

네가 또래들보다 키가 작잖아. 그런데 그건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너는 보기 드물게 깊은 생각과 넓은 마음을 가졌거든. 엄마가 12살이었다면 너처럼 못했을 거야. 엄마가 17살이었다면 너처럼 못했을 거야. 아니, 스무 살 어른이 된 엄마도 그렇게 못했을 거야. 아이야. 엄마에게 사람을 대하는 깊고 넓은 마음을 알려주어서 고맙다.


내 뒤에서 걷지 마세요.

나는 당신은 이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 앞에서 걷지 마세요.

나는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내 옆을 걸으며 친구가 되어 주세요.

- 알베르 까뮈(주1) 트 카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일게.

이 이야기는 그 시기의 이야기일 뿐이란다. 네가 언젠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저 그 시기에 엄마가 이 사건을 만났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고 보아 넘기면 된다. 비슷한 상황에서 늘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란다. 네가 자신을 속이는 '착한 아이'가 되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비슷한 일이 생긴다고 또 같은 맥락의 같은 사건이라는 법도 없거든. 네 마음을 속이고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꼭 함께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주1> 알베르 까뮈의 말로 알려져 있으나 출처가 불분명함. 작자 미상일 수도 있음.

표지 이미지> Image by u_uf78c121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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