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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장단을 맞출 줄 알지

너에게 배운 것 7

by 아라


아이야.

너는 초등학교 6년 동안 공동육아방과후에 다녔지.

공동육아방과후에서는 여름과 겨울이면 '들살이'라고 부르는 캠프를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갔잖아. 그런데 네가 10살이던 겨울, 방과후 친구들이 모두 가는 캠프에 가지 못하게 되었어.


- 하늘 : 근데 친구들이 갔다 와서 자랑만 좀 안 했으면 좋겠어. 어쩔 땐 기분이 안 좋아.

- 엄마 : 그래? 그럼 그냥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군' 생각하믄 어떨까?


- 하늘 :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근데 엄마, 이런 방법두 있다?! 친구가 꽹과리를 치고 있으믄 내가 장구를 쳐 줘두 돼. "그래? 뭐가 재밌었어?" 막 물어보구. 그러니까 친구가 피아노를 친다면 난 반주를 해주는 거지.


엄마는 네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단다.

그리고 네가 그 동안 공동육아 친구들과 단체로 해 왔던 풍물 활동을 떠올렸어. 너희들은 징, 장구, 북을 배웠어. 그리고 매해 여름엔 '한여름밤의 음악회'에서, 매해 겨울엔 '해보내기 잔치'에서 공연 무대에 오르지.

너희들이 했던 공연 중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건 북춤 공연이었어. 너희가 모두 힘찬 하나의 동작으로, 같은 박자로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너무 강렬하고 좋았어. 그 때의 북소리는 엄마의 가슴을 늘 함께 뛰게 했어. 이건 상상이 아니고 실제야. 그 웅장한 북소리에 엄마의 심장도 박자를 맞추는 거지. 온몸으로 직접 전해지는 그 울림,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하고 짜릿했어. 모두 함께 갑자기 소리를 낮추고 점점 크레센도가 되면서 웅장함으로 옮아가는 것도 멋있고 또 최고는 클라이맥스에서 나오는 그 '파도타기'였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사람에게서 옆 사람에게도, 그 사람에게서 또 옆 사람으로... 저희들은 연속적으로 서로에게서 동작을 받아 자신의 동작을 해내고 다음 사람에게 그 동작을 전달하면서 서로 연결되지. 삐그덕거림 없이 물 흐르듯 너희들 모두가 하나의 몸체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파도타기의 몸짓과 소리! 그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공연을 보던 우리 모든 아마들은 하나같이 돌고래 소리를 내면서 더 큰 환호를 보내곤 했지.


너희들은 사물놀이 공연도 여러 번 했었어. 사물놀이는 여러 악기가 어울려 다양한 조화를 만들어내는 공연이었어. 어쩌면 북춤보다 훨씬 높은 기술을기교가 높을지도 몰라. 북춤에서는 서로가 같은 박자와 같은 강도로 북을 치고 동작을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면 사물놀이는 조화가 중요하지. 상쇠와 징의 소리를 들어야 장구와 북을 칠 수 있었을 거야. 너는 사물놀이에서는 장구를 가장 좋아했어.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는 박자를 구사하려면 아마 많은 연습을 해야 했을 거야. 쇠(=꽹과리)와 징의 소리를 들어야 했을 거야.


엄마도 대학교 때 풍물패 활동을 한 적 있어. 저학년 땐 북과 장구를 주로 배웠어. 늘 길놀이를 담당하니까 그 땐 상쇠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하고 상쇠의 동선을 잘 따라가야 했어. 그래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룰 수 있으니까. 고학년이 되어서 선배들이 쇠(=꽹과리)를 가르쳐 주었어. 한겨울엔 남도로 '전수'를 떠났어. 좌도와 우도가 있는데 뭘 배웠던 건지 지금은 생각도 안 나네. ㅎㅎㅎ 암튼 '전수'는 풍물 연수 같은 거야. 본고장에 가서 본격적으로 배우고 몰입 연습을 하고 오는 거지. 그렇게 훈련을 받고 나면 곧 상쇠를 맡게 돼. 엄마도 3학년쯤부터인가? 상쇠를 맡게 되었어. 상쇠는 길놀이패 전체를 이끄는 꽹과리를 말하는 거야. 그 땐 내 박자를 모두가 따라 오기 때문에 혼자만 박자가 빨라지지 않는지를 늘 신경써야 했어. 혼자 흥분해서 박자를 달리면 다른 악기와의 조화가 흐트러지기 쉽지. 엄마도 역시 다른 악기의 소리를 계속 들어야 했어. 또 길놀이는 한 자리에 또는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게 아니거든. 길놀이는 몸을 움직여야 할 뿐 아니라 동선이 있어. 아이돌만 동선이 있는 게 아니라구. ㅎㅎㅎ 동선 역시 뒷 사람들이 모두 나의 동선을 따라 오기 때문에 운동장이라면 운동장, 도로 위라면 도로 위, 모두가 움직일 공간 전체를 조망하면서 발걸음을 내딛어야 했어. 전체를 보는 눈, 모두가 이루는 조화. 늘 그런 단어들이 엄마에게 중요했어.


그런데 아이야.

너는 그렇게 북을 배워 치고 사물을 배워 함께 치면서 '장단'을 맞추는 것을 배웠나 봐.


장단: 춤, 노래 따위의 빠르기나 가락을 주도하는 박자. (주1)


그래. 춤과 노래에만 빠르기와 가락을 주도하는 장단이 있는 것이 아니지.

친구가 꽹과리를 치고 있으면 장구를 쳐 줘도 되지!

친구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면 반주를 해 줘도 되지!

사람과의 대화에도 장단이 있지!

사람과의 관계에도 장단이 있지!


엄마는 네 말을 듣고 그제서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10살이었던 너에게 40살이 넘은 엄마가 한 수 배운 거였어. 늘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늘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왔는데 엄마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걸까?


아이야.

지난 봄, 네가 잠깐 집에 왔을 때, 우리 같이 아빠가 나간 마라톤대회에 응원하러 따라 갔었잖아.

그 때 그 특이한 풍선을 매달고 뛰던 사람들 기억나니?

그 사람들의 풍선에는 거리와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어. 10km 70분, half 01:25 등등. ‘10km 70분’은 10킬로미터를 달리는데 70분 만에 들어오는 속도로 뛴다는 뜻이래. 'half 01:25'는 half 마라톤 약 21킬로미터를 뛰는데 1시간 25분 만에 완주하는 속도로 뛴다는 뜻이래.


이 분들이 바로 페이스메이커(pacemaker)라고 했어. 이 날 처음으로 페이스메이커의 존재가 엄마의 눈에 들어왔어. 페이스메이커는 ‘중거리 이상의 달리기 경주나 자전거 경기 등에서, 기준이 되는 속도를 만드는 선수’래.


아빠가 출전한 대회 같은 아마추어 마라톤 대회에서는 참가자들을 위해 시간별로 페이스메이커를 둔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10킬로미터를 50분에 뛰고 싶으면 '10km, 50분' 풍선을 따라가면 되겠지. 나의 페이스가 10킬로미터를 70분이라면 '10km, 70분' 풍선과 나란히 뛰면 되지.


페이스메이커들은 완주는 물론이고 페이스 조절도 가능한 이들이 할 수 있대. 그러니까 아빠처럼 일반인 러너들은 하기 어려운 역할인 거야. 일반인들은 하기 어렵고, 노련한 마라토너들이 자원봉사 형식으로 참여한다고 해. 프로 중에서도 노련한 프로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런 이야기들을 알게 되니 엄마에게는 페이스메이커가 너무 멋있게 보였어.


너의 그 '장단' 이야기를 떠올려 글을 쓰면서 엄마에게는 '페이스메이커'가 함께 떠올랐어.

너처럼 친구가 신나서 이야기할 때 '장단'을 맞춰 주는 사람은 어쩌면 '페이스메이커'이겠구나, 생각했어. '장단'을 맞추는 너와 '페이스메이커'의 공통점이 있더라고.


첫째, 페이스메이커는 주인공이 아니야. 주인공은 러너지. 페이스메이커는 다른 러너가 뛸 때 그들이 뒤쳐지지도 않고 지나치게 오버페이스도 하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해 주는 사람이니 자신이 기록을 내는 주인공은 아니지. 페이스메이커는 주인공을 돕는 역할을 기꺼이 자처한 사람이야. 친구의 대화에 장단을 맞춰 주는 너는 친구를 기꺼이 주인공으로 만들면서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했지. 대화에서 친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기꺼이 '장단'을 맞춰 주는 너. 엄마는 기꺼이 그럴 수 있는 네가 너무 멋있어 보여. 그리고 엄마도 배우고 싶어졌어. "모모는 듣고 또 들었어요. 참을성 있게, 따뜻하게, 가끔은 아주 집중해서." (주2) 엄마가 좋아하는 책 '모모' 너도 읽었지? 모모는 듣기만 하잖아. 그런데 모모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사람들은 결국 삶이 바뀌지. 스스로 답을 찾아내지. 모모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옆에서 듣기만 하면서도 자기의 존재를 강력하게 드러내지.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하지.


둘째, 페이스메이커는 스스로의 페이스를 조절할 할수 있는 사람이야. 스스로의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건 전체를 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야. '장단'을 맞춰 주는 너는 대화에서 페이스를 조절하는 사람이야. '장단'을 맞춰 주는 너는 대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사람이야. 어쩌면 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지만 진짜 이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장단'을 맞추는 너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아이야.

사람과 사람의 대화에서 서로에게 '장단'을 맞춰 주고 서로에게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어. 대화에서의 역할을 고정된 것이 아니잖아. 대화에서 화자, 말하는 사람은 늘 바뀌게 마련이지. 때로는 내가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장단'을 맞추어 주고 때로는 네 친구가 너에게 '장단'을 맞춰 주면서 네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겠지.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똑같은 것 같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서로에게 '장단'을 맞춰 주고 서로에게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 있다면 양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고 힘이 되기도 할 거야.


엄마가 최근에 글쓰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책을 한 권 내는 경험을 했잖아. 엄마는 여러 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지. 공동으로 책을 쓰는 엄마 같은 분들이 출전하는 '선수'라면, 함께 글쓰는 작업에서도 모두를 위해 기꺼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는 분들이 계셨어. 스스로를 위해서도 글을 쓰지만 모두가 함께 쓰는 글을 위해 자신의 글 쓸 시간을 기꺼이 내놓은 분들이 계셨어. 때로는 좋은 문구와 수집해 놓은 인용문들도 그냥 내어주셨고 때로는 모두의 글이 더욱 깊어질 수 있도록 자신이 공부하며 얻은 지식과 정신도 기꺼이 나누어 주셨어.


엄마는 글 쓰는 내내 그 분들께 참 고마웠어. 내가 내 실력보다 조금 더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우리 편이 있어 참 든든하고 감사했고, 때론 가슴 뭉클했어. 아마 그 분들이 책을 내면 엄마는 기꺼이 책을 사겠지. 그렇게 하여 엄마가 받은 것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갚아 나가겠지.


그렇게 한 편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 있다면 삶의 과정에 큰 힘이 될 거야.

지금 너는 네가 정한 목표를 위해 뛰고 있고, 엄마는 엄마의 목표를 향해 뛰고 있지. 어쩌면 너와 엄마도 서로에게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고 있을 거야. 우리도 서로의 삶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을 거야.


각자가 자신의 삶을 걷는 길에,

엄마에게 너의 존재가 힘이 되듯, 너에게도 엄마의 존재가 작은 힘이 되기를 바란다.



주1> 네이버 국어사전.

주2> 미하엘 옌데, 《모모》, 2014, 비룡소.




글에 들러 주시는 글친구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새로운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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