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지위 사이

by 정아라

"토 달지 말고 대표님 결정대로 그냥 합시다!"


A는 어떤 조직의 대표로 선출되어 1년 동안 대표로서 역할과 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 B는 A가 대표로 선출되어 일할 동안 함께 운영진을 맡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날.


"이렇게 결정합시다."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A는 어떤 제안을 하였고 구성원들을 그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 여러 질문들을 하고 있다. 질문과 답변을 하다가 일부 구성원들은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중이다. 그때 B가 말한다.

"토 달지 말고 그냥 대표님 결정대로 그냥 합시다!"


그러나 다양한 의견을 개진 중이던 이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A가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지금 회의 중인 거 아닙니까. 모든 의견을 개진한 후 함께 결정하면 됩니다."


A와 B를 다시 보자.

A는 대표가 되자 많은 일에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많은 의견을 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대표가 되어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회의 시간을 생략하고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려고 한다. 구성원들과는 술잔을 기울이며 '형님', '아우' 사이를 맺는다. A는 완.장.을 찬다. 일부 구성원들에게는 돈도 빌린다.


별명을 부르는 문화가 있는 곳인데, B는 A를 별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늘 "대표님" 또는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의 오른팔처럼 늘 가까이 있으면서 A가 의견을 내면 "좋은 생각이십니다." 말한다. 반대 의견이 나오면 "에이, 형님 좀 밀어줍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는 엄석대라는 문제적 인물이 등장한다. 엄석대는 시골 초등학교의 반장이다. 그는 담임 선생님의 신임을 바탕으로 반 아이들을 통제하고 군림하면서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그는 팔에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찼다. 그는 주어진 역할을 나름대로 다하지만 지위에 집중한다. 지위를 활용하여 성적을 조작하는 비리를 저지른다.


엄석대는 '반장'이라는 공식적인 '지위'를 가졌다.

지위 자체를 터부시할 필요는 없다. 지위는 아무 죄가 없다.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지위의 존재 이유는 명확하다. 지위가 존재하는 이유는 특정한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장의 '역할'은 학급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더 많이 하는 것, 필요하다면 선생님을 도와 학급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일 것이다. (어후 말로만 해도 반장 재미 없다 ㅎㅎㅎ) 그런데 그는 요구되는 역할이 아니라 지위를 활용해 '군림'과 '착취'를 하고 말았다.


그가 집중했어야 할 것은 '지위(Status)'가 아니라 '역할(Role)'이 아닐까.

엄석대는 일그러진 관계를 만들고 말았다. 학급의 친구들을 조종하고 개인의 이익을 취했다.

그는 친구들을 존중하고 협력해야 했다. 친구들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협력을 만들어 나가야 했다.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했다.




나는 사실 '지위'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지위가 나를 옭아매는 것 같고 자유를 빼앗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또 나는 일을 할 때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 재미가 반감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시점에 맨 앞에 와 있는 경우가 있었다. 맨 앞에 서려고 했던 적은 한 번도 없고 그저 내가 재미나서 신나게 일이나 활동을 했을 뿐인데 어느 새 정신 차려 보니 내가 맨 앞에 와 있는 느낌? 내가 앞으로 온 게 아니고 앞 사람들이 어느 새 사라진 거다. ㅎㅎㅎ


역할과 지위는 늘 함께 다닌다. 그런데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역할'이다. 그 역할을 해야 하니 그에 따른 지위와 권한을 부여한 것 뿐이다. 그러니 역할과 지위를 헷갈리면 안 된다. 둘 중 어떤 것이 중요햐냐고 묻는다면 '역할'이 우선적이고 역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또 지위가 주어질 때는 지위를 볼 것이 아니라 '책임'을 보아야 한다. 지위를 주는 이유는 책임을 부여하기 위해서이지 그 지위가 중요해서가 아니다.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지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일터에서 역할이나 지위보다도 더 우선되는 것이 있다.

역할이나 지위를 결정함에 있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공동체가 함께 가고자 하는 방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어떤 이가 역할이나 지위를 다한 것 같은데도 문제가 발생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자만 다른 방향으로 갈 때이다.

함께 배를 저어가고 있다. 모두에게는 노를 젓는 동일한 역할이 주어졌다. 모두가 너무나도 열심히 노를 젓고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거꾸로 앉아 있다. 거꾸로 앉아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는 모두가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로 노를 젓고 있는 것이다.


혼자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아무리 주어진 역할을 다한대도 소용이 없다. 다른 방향으로 열심히 젓고 있으면 모두가 하는 방향과 맞지 않아서 오히려 공동체에 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이 다른 목표를 보고 있다면 그는 그냥 쉬고 있는 게 낫다. ㅎㅎㅎ


그 역할이나 그 지위가 대체 왜 필요한가. 공동체의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해서이다. 공동체의 목표를 향해서 갈 때 역할도 지위도 의미 있는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가 높은 사람이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 문명 사회의 척도이다.

- 알베르 슈바이처(Abert Shuweitzer)



표지 이미지> by Manfred Richt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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