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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Apr 26. 2022

여자에게 부엌 살림의 천부적 재능이?

‘건축탐구-집', 확 끊을까 보다

요즘 우리 부부는 '건축탐구-집'이라는 EBS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집 짓고 살아보는 로망이 있는 거 아닌가?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언젠가는 집 짓고 살아 볼 수 있을까, 하면서 주말에 밥 먹으며 슬렁슬렁 TV를 본다. 어느 날부터인가 쓰다 남은 아이 노트도 한 권 가져와 프로그램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가 나오면 적어 놓기도 한다.


이렇게나 즐겨 보게 되었는데, 요즘은 보다가 조금 화가 나기도 해서 끊을까 말까 고민 중이다.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떤 편을 보고 있었는데 남편이 집의 모든 공간을 자신이 꿈꾸던 대로 지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화장실 벽을 유리로 만들어 개방감을 갖추었다는 거다. 아내는 그것을 반대했고 지금도 반대하고 있다 했다. 그러더니 곧 주방 소개가 이어지고 자막과 함께 나래이션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주방만큼은 아내의 로망이 실현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집 소개를 한창 하다가 보조 주방이 설치된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번엔 자막이었다.


 다용도실+요리. 아내에게 꼭 필요한 보조주방


또 다른 편에서는 아내가 주방을 하나 하나 설명해 주고 이렇게 큰 주방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제가 요리를 좋아하고 요리해서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해요.


주방을 넓게 만든 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주방이라도 아내 뜻에 따라 설계해 만들었다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조주방. 나도 가족 살림 살다 보니 보조주방이 아쉬울 때가 있다. 보조주방이 쓸모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보조 주방은 죄가 없다. 멋진 보조 주방을 만든 건축주 부부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 실용적으로 잘 지은 공간이다. 그리고 멋진 집을 지은 부부 중 아내가 요리를 좋아하거나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도 역시 아무 문제도 없다. 매일 해야 하는 요리를 좋아하기까지 하다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문득 때때로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나는 살림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도 요리가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데, 왜 방송에는 나 같이 요리 싫어하는 여자들은 도통 나오질 않는 걸까? 진짜 없는 걸까? 또 남자 중에 요리 좋아하는 사람은 백종원 급 아니면  보기 힘든데 왜 여자 중에는 요리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까?

한 번 가정을 해 본다. 어떤 여성이 있다. 그는 날 때부터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나 요리를 좋아한다. 이럴 가능성이 얼마나 높을까, 생각해 본다.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도 사실은 수학에, 언어에, 피아노에, 그림에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의 수와 비슷하지 않을까?


오히려 오랜 세월 삼시세끼 요리를 전담하다 보니 요리 실력이 점점 늘고 실력이 늘다 보니 좋아지고 재미있어진 것은 아닐까?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요리를 너무나 좋아하는 여성이 이렇게 많다기보다는 요리를 지나치게 여성들만이 오롯이 담당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여성들이 요리를 좋아하는 것은 여성이 살림에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 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결과로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 프로를 이제 그만 볼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전통적인 가족의 성 역할 - 남자는 바깥일(?)을 하며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일, 특히 부엌을 담당하는 게 적합하다는 -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하, 너무 화나. 이 프로 그만 볼까 봐.

- 그치? 맨날 여자들이 부엌에 있지?


오랫동안 같이 시청했던 남편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너무 많은 회차에서 여성들의 공간이 부엌이라는 걸 은연 중에 말하고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가 출연자들이 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이 프로 컨셉이다!


남녀 사이에 타고난 성차가 별로 없다는 걸 증명하는 연구 결과는 매우 많다. 김고연주에 따르면,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심리학자인 재닛 시블리 하이드는 2005년, 성차를 다룬 모든 심리학 연구를 모아 남녀의 성차가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연구를 했다. 인지 능력, 대화 스타일, 성격, 정신 건강, 신체 및 운동 능력, 기타 6개 연구 분야를 추려서 연구 결과들을 정리했는데, 전체 연구의 78%에서 성차가 '미미하거나 거의 없음'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김고연주, <나의 첫 젠더 수업>, 28쪽)


미국의 뇌과학 전문가인 팻 레빗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이 남성보다 멀티태스킹에 더 뛰어나다는 가설을 뒷받침해 줄 연구는 없습니다. 사실, 멀티태스킹은 남녀 누구에게나 좋지 않아요. 우리 뇌는 한 번에 하나 이상의 복잡한 일을 처리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여성들이 가정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건 그 일을 더 잘하는 쪽으로 생물학적 변이가 일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문화적인 영향이라고 봅니다. 여성이 그걸 더 잘한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는 거죠."
(이브 로드스키, <페어 플레이 프로젝트>, 89쪽)


우리 가정을 한 번 돌아보면 어떨까. 여자가 남자보다 집안일을 더 잘한다고? 엄마가 아빠보다 집안일을 더 잘 한다고? 그러면 그 가정에서는 여자가 집안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수많은 연구에서 남녀의 타고난 성차가 거의 없다고 하지 않나? 남자가 집안일을 못한다는 건 명명백백 편견에 불과하니 이제부터 그런 편견을 버리면 된다.

우리집은 여자가 집안일을 더 잘 한다고? 그러면 이제부터 그 집의 남자들은 집안일을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연습하고 연마해야 한다. 남성이 날 때부터 부족한 게 아니다. 남자도 잘할 수 있다. 나는 남자들의 능력을 믿는다. 직장일도 저 정도 해 내고 있는데 직장일보다 집안일이 조금 더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남자도 할 수 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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