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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회식

보상은 없고 회식은 있다

by 아라 Feb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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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나도 빵점 맞으면 빵 사 줄 거야?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학교에 다녀 온 아이가 친구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 엄마, 우리 반 OO이가 이번 수학 단원평가에서 빵점을 맞았거든? 근데 아빠가 빵 사 주셨대.

- 응?

- OO이 아빠가 쭉 같은 번호만 써도 한두 개를 맞았을 텐데 다 틀렸다는 건 다 풀어 봤다는 거라고. 다 풀었는데 빵점 맞는 게 진짜 어려운 거라고. 그래서 빵 사 주셨대. 엄마, 나도 빵점 맞으면 빵 사 줄 거야?      


나는 빵 터져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 아니. 엄마는 빵점 맞아도 빵 안 사 줄 거야. 엄마는 빵점 맞아도 빵 안 사 줄 거고 백점 맞아도 빵 안 사 줄 거야. 점수 몇 점 받았는지는 칭찬 받을 일도 아니고 혼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네가 공부 잘 하고 못 하는 걸로 뭘 사 주지는 않을 거야. 빵은 그냥 빵 먹고 싶을 때마다 사 줄 거야. 그러니까 빵 먹고 싶을 때 말해. (여기 빵이 몇 개냐.)     


나는 아이의 학교 점수나 성적을 가지고 어떤 보상도 체벌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학교 점수나 성적은 엄마인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가르친 것에 대한 보상도 아니다. (사실 엄마가 뭘 가르친 적이 없... 지분이 1도 없음). 오로지 아이의 현재 학습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고 아이가 노력한 것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아이가 시험을 잘 보고 와서 기뻐하면 아이에게 기쁜 일이 생겼으니 함께 기뻐해 줄 것이다. 아이가 시험을 잘 못 보고 와서 속상해 하면 아이에게 속상한 일이 생겼으니 함께 속상해하고 격려와 위로를 건넬 것이다.     


부모의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를 길들이고 싶지 않았다. 부모의 칭찬과 처벌이 아이의 동기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아이는 학생이고 학교는 아이에게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선생님도 만나고 친구도 사귀는 곳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고 그렇게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시험, 성적, 점수 같은 것에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배움을 놓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아이가 5학년인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왠지 아이가 약간 격앙되어 보였다.

- 엄마! 내 말 좀 들어 봐! 이게 말이 돼?

- 무슨 일 있어?

- 친구가 이번 시험을 잘 못 봤거든. 근데 엄마한테 혼났대! 이게 말이 돼? 친구가 시험을 잘 못 보면 누가 제일 속상하겠어? 당연히 친구가 제일 속상하지. 근데 엄마가 왜 혼을 내는 거야? 위로는 못해 줄 망정...

- ㅎㅎㅎㅎㅎ (그저 웃지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그 ‘빵’ 대화 이후 시험 성적을 이유로 아이를 혼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아이는 시험 성적을 이유로 엄마에게 혼났다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이가 방학하는 날이면 가족끼리 특별한 회식을 한다고 했다. 그 선배는 강남에 살면서 작은 빌라에서 아이를 키운 분이다. 아이 교육 때문이 아니라 가족의 사정이 있어 그렇게 지내셨다. 아파트가 아니라 빌라에 사는 것도, 집 평수의 넓고 좁음도 삶에 있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은 이미 알고 있고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이가 강남에서 학교 생활하면서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는 걸 안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한 학기를 마칠 때마다 ‘네가 애쓴 거 엄마가 다 알아.’ 하고 안아주고 아이가 정한 메뉴로 회식을 한다는 거였다.


‘아, 이거다!’

그 때부터 우리도 가족 회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회식 날은 아이의 한 학기 종업식/ 졸업식 날 또는 그 주 주말이다. 우리 가족 회식날은 아이가 한 학기 동안 해 온 수고와 애씀을 인정하고 안아주는 날이다. 아이와 거의 매일, 저녁마다 함께 식사하며 그날의 다양한 에피소드와 각자의 생활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날의 이야깃거리는 아이가 한 학기 동안 겪었던 일들, 아이가 들려 주었던 학교 생활 같은 것이다. 아이가 겪은 어려움을 지나온 이야기, 아이가 멋졌던 순간들, 아이가 엄마, 아빠의 그 무렵보다 나은 점도 얘기도 해 준다. 어떤 날은 아이가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다 같이 보면서 긴 시간 맛난 것을 먹고 마시기도 한다. 우리는 포도주를 따르고 아이는 포도주 잔에 포도 주스를 마신다. 아이는 회식을 좋아한다. 방학이 며칠 안 남았을 때면 달력을 보며 들뜬 얼굴로 말하곤 했다.

- 엄마! 우리 이번 주 회식이야!


우리집엔 아이의 성적에 대한 보상은 없다. 하지만 아이의 애씀에 대한 인정과 함께 회식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들이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도록 돕는 것이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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