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타’ 맞은 ’금사빠‘의 브런치 일지 2
뜬금없는 소리다.
나는 ‘아침형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올빼미형’도 아니다.
'금사빠형'(주1) 인간이다. 전형적인(?) ‘금사빠형’ 인간이다. 새로운 것에 금방 마음을 빼앗기고 오래된 것을 쉽게 버린다. (남편 안 버린 게 천만다행)
세상에는 흥미를 끄는 일이 널려 있고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 호기심도 많다. 그래서 낯선 일, 새로운 일을 쉽게 시작한다. 겁이 없고 몸이 가벼우며 생각은 짧고 결정은 빠르다. 대체로 ‘와, 재밌겠는데? 일단 해 보지 뭐.’ 한다.
그런데 모든 것에 양면성이 있다. 장점이 모든 면에서 장점이 아니고 단점도 모든 면에서 단점이 아니다. 어떤 특성이 장점이 되기도 단점이 되기도 하는 거다. 그러므로, 이 장점은 다른 장면에서는 너무나 큰 단점이 된다. 하다가 안 되면 ‘안 돼? 그럼 말지 뭐.’ 한다. 새로운 일을 쉽게 시작한다는 것은 하던 일 중 일부를 새로운 일을 위해 쉽게 버린다는 뜻이다. 꾸준히 한 가지에 집중을 못 한다는 뜻이다. 브런치와 글쓰기가 다른 것에 밀려 버렸다는 뜻이다.
몇 년 전 석사를 마쳤고 재작년에 박사과정에 입학해, 이제 막 박사과정 코스웍를 마쳤다. 돌아보니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다른 전공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스스로의 삶을 살았다 생각하고 대체로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깊숙한 곳에는 말 못하는 부끄러움이 너무나 많았다. 간혹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만났지만 ‘대체 뭐가 부럽지?’ 싶을 뿐이었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지. 한 우물을 파지 못했는데? 이 나이가 되어도 이룬 것이 없는데?
2025년. 아이가 스무 살이 되자 갑자기 ‘현타’(주2)가 왔다.
이제 아이도 다 키웠고 곧 떠나가는구나.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훌륭하지는 않아도 아이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살아왔는데 좌표를 잃은 듯 갑자기 흔들렸다. 이제 그저 논문 성실하게 쓰면 되는데. 겨울 방학 동안 논문에 쓸 책들 읽으려고 학교 도서관에서 책도 많이 빌려 왔는데. 그런데 흔들렸다.
그러던 중 지담님이 불씨를 지핀 ‘위대한 유산’을 만났고 무언가에 홀린 듯 모임에 참여했고 왠지 여기에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보이지 않는 강한 힘에 이끌려 ‘엄마의 유산’에 합류하게 되었다. (T에게 이런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지난 1월 21일. 3년 가까이 비워 두었던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가 스무 살이 되었고 엄마라는 ‘역할’을 중심으로 보면 이제 아이에게 해줄 건 별로 없다.
그러나 아이가 스무 살이 되었다고 엄마의 성장과 삶이 멈추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호기심도 많고 여전히 에너지도 넘치는 나는 새롭게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성장하는 아이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계속 성장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재발견하는 중이다.
(현재의 직장에 오기 전까지는) 10년 이상 다닌 직장이 없었던 나. 이리저리 전공을 바꾼 나. 꾸준히 해낸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했던 나. 한 우물을 파지 못해 이룬 것이 없다고 자학했던 나.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나는 끝없이 배워가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한 분야만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데? 분야를 바꿔서 배우면 뭐가 어때서? 사람이 잘 살아가려면 원래 여러 가지를 골고루 먹어야/알아야 하는 거잖아? 배우며 성장하는 데는 끝이 없는 거잖아.
나는 그 누구에게도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몸을 가볍게 움직여 또 다른 배움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시 생각하니 나는 꾸준히 배우며 성장하는 사람이었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제까지의 경험과 공부들이 갑자기 연결되는 듯하고 퍼즐 조각이 조금씩 맞춰지고 있다.
시작은 미약하다. 쓴 글의 수가 (참 귀엽게도) 31개. (그렇게도 쉽게 던져 버렸던 내가 부끄럽다.)
구독자 수는 167명. 아. (이분들은 미약하지 않다.) 사람을 숫자로 본 적은 없기에 새삼 귀하고 감사한 분들이다.
이번에는 첫 시도보다 조금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논문 쓴다더니 또 딴짓하니?’, ‘그래 봤자 너는 결국 얼마 못 갈 걸?’ 등등 내면의 부정적 목소리도 계속 들려오는 것 같다. 꾸준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나의 과거가 내 발목을 잡으려고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그래도 지금의 나는 '그냥 쓰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들에 대항해 본다.
이렇게 다시 브런치와 함께 ‘위대한 여정’에 나선 분들과 함께 나의 다음 단계의 성장을 시작하고자 한다.
※ 주1. ‘금사빠’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의 줄임말.
※ 주2. ‘현타’는 ‘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
※ 사진 출처: pinterrest(https://kr.pinterest.com/pin/2744449766384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