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풍 Mar 25. 2024

수선화 세 뿌리

엄마의 봄날은

“대한 독립 만세!"

엄마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탄성.

‘드디어 봄은 오는구나!’     

오늘에서야 엄마는 봄이 느껴진다. 

그건 너희들의 석 달의 기나긴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기 때문이야. 개학하니 너희 셋이 모두 각각 대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자기 자리로 가고, 엄마에게는 빈 공간과 시간이 생기는 거지. 사람마다 봄을 느끼는 계기가 다 다를 거야. 지금 엄마에게는 바로 이 빈 공간과 시간, 그리고 우리 집 앞에 나란히 심어둔 수선화가 봄을 알려주는 신호야. 겨우내 엉망진창이 된 집 옆 누런 잡초들 사이에서 언제인지 모르게 비집고 뾰족 뾰족 올라와 있는 수선화 이파리들과 노란 꽃이 들어있는 봉오리들을 발견하고는 얼른 사진을 찍었어. 봄이 너무 반가워서. 


축축 늘어지고, 춥고, 움직이기 싫은 몸에서 나는 해방이 될 것만 같아서. 

새 학교로 진급하는 너희들이 겪어야 할 진통이 있듯, 엄마도 너희들과 같이 겨울 진통을 겪거든. 

감히 일제 강점기 ‘대한 독립 만세’에 비할 만큼 내게는 절박한 봄. 아무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긴 겨울 답답한 추위에 갇히고 집 안에 갇히고 게으른 몸에 갇혀서, 알게 모르게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겨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봄.

시작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나의 계절 봄.

너희들은 개학이 힘겹고 두렵기도 하겠지만, 엄마에게 개학과 함께 오는 봄이란 그래. 


“엄마는 우리 나가는 것만 기다리고~, 흥칫뿡!”

막내 목소리가 들린다. 

좀 서운하지?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언제부터인가 너희들도 수선화가 올라오면

“엄마! 수선화가 어느새 올라왔네~”

하며 서로에게 알려주곤 했어.     

언제 우리 집에 수선화가 와서 봄을 알려주기 시작했는지 아니?

시작은 너희들 친할머니의 60세 회갑 잔치.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이네. 둘째 셋째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고, 아이는 첫째 하나이던 30대 중반도 안된 젊은 엄마, 아빠였을 때야. 둘째 셋째가 또 자기는 없다며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만 해도 엄마, 아빠에게 둘째 셋째 아이는 인생에 없을 줄 알았으니 미안해도 어쩔 수 없네. 엄마 인생의 대형 사건 중 하나가 터진 지 3년쯤 되던 해였구나.


너희들 친할머니는 자랑이자 힘이었던 막내아들의 갑작스러운 암으로 삶의 희망도 의욕도 잃고 외출도 안 하시고 음식도 잘 안 드셨어. 아픈 아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병원에도 못 오시고, 아들을 만나지도 않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몇 년을 지내셨지. 아마 아픈 아들을 만나면 마음이 무너지고 눈물만 나서 아들 맘을 더 힘들게 할까 싶으셨나 봐. 그렇게 3년 정도 우리 집은 모두가 어두운 먹구름에 흐린 날을 살게 된 거지. 지금이야 암에 걸려도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하고 여러 가지 좋은 사례가 많지만, 그때의 암은 죽음으로 가는 길 같았거든.


아빠는 살기 위해 수술과 항암치료는 기본이고, 산행과 운동에 별의별 식이요법과 민간요법인 버섯 요법, 한방차 요법, 사과 요법 등 온갖 것을 찾아 시도하며 스스로 살아나기 위해 24시간을 노력으로 채웠단다. 가족들과 살 길을 찾겠다고 항암치료 중에 공무원 시험까지 보고 ‘살기 위한 모든 것’을 했단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너희들을 만나기 위해, 아빠로 살기 위해, 온 생명의 힘을 다했던 것 같아. 

“잘 씻어라. 잠 좀 그만 자라, 정리 좀 해라, 청소 좀 해라.”


온갖 잔소리를 들으며 엄마에게 혼나는 철없는 아빠 같지?

사실 엄마 마음 깊은 곳에는 ‘깊은 존경과 신뢰’가 있단다. 너희들에겐 자주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날마다 차곡차곡 소리 없이 쌓여 있단다. 자주 티격태격하는 친구 부부이지만 왠지 알 수 없는 ‘베프’ 같은 그 느낌이 바로 거기서 오는 거지.


사건 발생 후 3년 정도 지나고 이제는 우리도 평범하게 아이 키우며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니 걱정 마시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일까? 할머니의 60 회갑 여행을 계획했어. 마침 아빠 직장에서 콘도를 빌릴 수 있으니 저렴하기도 하고, 실내 물놀이장에서 너희들과 사촌들이 놀 수도 있었거든. 큰맘 먹고 큰 통에 LA갈비 재워 담고, 오이소박이 새로 담아 정성껏 할머니 회갑 여행을 갔었어. 마지막 날 돌아오는 길에 수덕사라는 절에 들러 돌아보는데, 들어가는 입구에서 수선화를 팔고 있네. 그때 그 이쁜 꽃이 ‘수선화’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된 거야. 흔히 꽃가게서 봄에 보이는 ‘프리지어’랑 비슷한데 왠지 맘에 끌리고 사고 싶길래 2천 원에 세 뿌리를 사 들고 집에 와서 마당에 심었어. 생전 화초도 꽃도 관심 없던 내가 이상한 일이지, 우연히 마음이 끌리고 한참을 들여다보며 사고 싶었던 수선화 세 뿌리였지.


신기하게 다음 해에도 봄만 되면 누리끼리 엉망진창인 마당 잡초더미 속에서도 초록초록이 뾰족하게 올라오며 봄을 알려주었지. 그것도 해마다 두 배 이상으로 새끼를 치며 늘어나면서 말이야. 여러 해를 살며 스스로 알뿌리로 번식해서 늘어나는 것도 몰랐거든.  두 배도 더 늘어난 수선화 더미를 캐어서 여기저기 작은 알뿌리 새끼들을 심어두면 다음 해에는 또 세 배가 넘고, 너무 재미있어서 한 줄로 나란히 집 옆에 심기도 하고 여기저기로 옮겨심기도 했어. 옆집 외할머니도 예쁘다며 얻어다가 여기저기 마당에 심으셨어. 외할머니는 동네를 돌아다니다 다른 종류의 수선화도 예쁘다며 얻어오셨지. 그 수선화들이 새끼를 쳐서 나무 주변에도 동그랗게 심어 두고 봄마다 이뻐하며 마당을 지날 때마다 즐거웠단다. 종류도 크고 흐린 꽃, 작고 진한 꽃, 겹꽃 등으로 다양해지고 말이야.     

왜 느닷없이 수선화 이야기냐고?

오늘 아침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 인생에 봄이 있다면 언제였을까? 

신나게 뛰어놀던 철없던 어린 시절? 꿈 많던 10대? 자유로운 청준 20대? 결혼한 30대?

생각해 보다가 알았어. 엄마의 봄은 오늘 아침이더라.

너희들이 다 각자의 학교로 가고 아빠도 직장으로 가고 나는 햇볕을 쬐며 집안일을 하고 ‘오늘 무얼 할까’ 생각을 하며 손수 내린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그 순간. 

‘이 아침이 바로 나의 봄날이구나.’

이어서 드는 생각이

‘ 내게 봄을 알려주는 수선화 세 뿌리는?’ 

각자 다른 모양으로 자신의 노란색을 품고 겨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수선화. 그저 나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세 뿌리의 수선화를 우리 집 땅에 묻어 두기만 했는데,  마음이 향하는 곳을 따르니 수선화가 우리 집을 둘러싸게 되고, 매년 봄을 알려주는 수선화.  너희들이 떠올랐어. 그 수선화 봉우리 속 노란 꼿들이 너희들 같다고. 

너희들 셋이 있어서 나는 봄도 기다리고, 자연의 섭리도 알게 되고, 잡초도 뽑고 싶고, 정원도 가꾸고 싶고, 집도 가꾸어 가고 싶었더구나.      

‘고맙구나, 나의 아이들’

이야기(주로 핸드폰 시간이나 용돈 등의 불평불만)를 귀담아듣지 않아도, 엄마가 너희들 핸드폰 시간을 줄여도, 브랜드 옷을 안 사줘도, 대화 안되고 답답한 꼰대 범생이 잔소리만 해도 다 바람에 흘려보내고 잊어다오.

이 말만 기억해 줘.     


잊어주라

“진짜 지겨워 죽겠어.” “어우, 짜증 나” “못 살겠어” “이럴 거면 왜 셋 낳자고 했어?” 너희들에게 쏟아내고 아빠에게 쏟아냈던 그 말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감당할 게 너무 많아 힘들었던, 철없던 엄마가 한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 진짜 알맹이는 아니란다. 남들은 아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엄마는 아이를 그저 책임지고 최선을 다하려고만 했던 그런 사람이었던 거 같아.

너희들이 아이를 낳아 키울 때, 그때 잠깐만 떠올려도 돼. ‘우리 엄마도 그저 이런 시절이었던 거구나’ 하고 말이야. 그때까진 꼭 땅에 꼭꼭 묻고 잊고 있으렴.      


엄마는 오늘 너희들이 모두 건강하게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 고맙고 행복하단다. 내가 지금 있고 싶은 곳에 있게 해주는 오늘 이 순간을 나의 가장 빛나는 봄날로 만들어준 너희들. 정말로 고맙다. 나의 세 뿌리 수선화는 너희들이야. 이제야 알았구나.

각자의 색으로 모양으로 꽃을 피우고 두 배 세 배 널리 퍼뜨려 엄마의 정원에 매년 봄을 가져와 주는 나의 세 뿌리 수선화.

기억해 줘~. 엄마의 마음속 깊은 곳 딱 한마디 말만. 

“고맙구나. 나의 세 뿌리 수선화”     

오늘 엄마는 사진을 찍었어. 파릇한 수선화와 아빠가 일 년 농사를 위해 곱게 갈아놓은 밭에 심어진 쪽파들 사이에 서서, 멜론색 집업 재킷과 레깅스로 한껏 멋을 낸 막내를 찰칵 찍어둔다. 아무것도 아닌 오늘 하루가 나의 인생 최고의 봄날 한 장면이니까.                   


  2024년 3월 엄마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