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방 2부 2-4

2부 2-4

by 투명물고기

나는 사랑을 했어.



십 년이 넘었어. 나는 지금도 중증 우울 장애 환자지만, 그때는 더 아팠던 시절이었을걸. 가족이 무엇인지, 부모가 무엇인지, 엄마란 마땅히 어때야 하는 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홀로 두 아이를 기르던 시절 말이야. 젖먹이 둘째는 바닥에 내려놓기만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안기려 하지도 않았어. 후에 알게 되었지. 나의 미칠 것 같은 불안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서 내 딸은 그토록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거. 벌써 불안과 우울 때문에 약을 먹는 내 딸은, 그때 운명이 정해진 것이 아닐까 하면 또 눈물이 날 것 같네. 지금의 생각과 감정과는 별도로 그 십여 년 전의 시간을 생각하면 곧바로 눈물이 나. 절연한 부모, 오후까지 자다 겨우 직장에 나가 열 두시가 넘어 돌아오는 남편, 아는 사람도 딱히 없는 낯선 동네. 그때 어떻게 살아냈을까.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버려. 오히려 그래서 감사가 생기는 건 정말 웃기고 무섭지 않아? 그런 시절을 살아낸 내가 참 다행이란 안심이 들다니.




나의 십 년 전, 그때는 그런 때였어. 넉넉하지 않은 형편, 내 몸도 마음도 바닥이었고, 불안은 최고였던 시절. 기댈 곳은 없고 작은 영혼 둘을 책임져야 하는 막대한 부담으로 매일매일이 가시밭이었다고 해도 될까. 근데 또 슬프고 어이없는 건 말이야. 그 시절의 나는 지금껏 중에 제일 살림에 열중했어. 내가 돌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돈도 못 버는 존재라고 나를 채찍질하면서 아이를 들쳐 엎고 매일 깨끗하게 청소를 했고, 아이 식판이 빈 곳이 없도록 국과 반찬을 준비했어. 잡곡을 섞어 압력솥으로 밥을 지은 것은 물론이고 말이야. 아.. 답답해.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건 왜 그런 거야?



아무튼 그런 때였어. 잘 기억나지 않는 하루하루 말이야. 컴퓨터 앞에 앉을 일이 없는 내가 친구의 부탁으로 메일을 열어봤지. 일 년도 더 전에 마지막으로 로그인한 아이디. 잠이 들었어도 내려놓을 수 없는 작은 아이를 안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내 모습, 너는 상상할 수 있니?



삼천 개가 넘도록 쌓여있는 메일을 지우고 싶어졌어. 정신없이 놓여있는 내 생활을 정돈하고 싶은 바람이었는지도 몰라. 중요한 개인 메일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메일 제목을 훑으며 반복적으로 지워나가던 중에 깜짝 놀랐어.




”잘 지내요? “

숨을 골랐어. 이 말투는 그 애가 분명하니까. 그리고 처음 보는 메일 주소는 그 애의 이니셜이었거든. 사실 단숨에 열었는지, 너무 놀라서 시간을 가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잘 지내요? 사건이 있어서 주변을 다 정리했어야 했어요. 좋은 학교는 아니지만 미국으로 유학 와서 즐겁게 다니고 있어요. 시간 내서 여기 가봐요. 경북 봉화군 **사. 내가 이십 대에 찾아 헤매던 답은 여기 있었어요. -



이제 와서 생각하니 서운하네. 그런데 그때 나는 그런 걸 따질 수 없었어. 불친절한 짧은 메시지에도 그 애가 살아있다는 것이 기뻤거든. 왜 그랬을까. 나는 쏟아져 나오는 마음을 어찌할 길이 없어서 영어로 짧은 답장을 썼어. 내가 왜 그랬나 헛웃음이 나. 허영이었을까. 대단히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우스웠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랬어. 내용은 뭐 영어로 적어서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잘라낸다 하는 설명과, 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기쁘다고, 네가 연락해 주어서 좋다고.



그다음 날 정신을 수습하고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내게 정상이라곤 없지만 - 다시 메일을 썼어. 이년의 시간 동안 산 이야기. 아이가 둘이 된 거, 직장에서 좋은 기회를 얻기도 했던 거. 남편과의 사랑 -The sweetest flower when first lt’s new, but love grows old, and waxes cold.”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팝송의 가사를 빌려서 - 그런 것들. 하지만 뒷 가사는 붙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 Fade aways like morning dew. 그건 아니라고 진심을 담았으니까. 나는 죽지 못해 산다는 자기 형편도 모르면서, 그 애에게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나 봐. 지금 뒤돌아 보니, 마음이 슬프고 아프네. 그리고 이제 좀 친절해도 되지 않겠냐고 덧붙였어. 나는 전화번호도 바뀌지 않았고, 너와 지내던 그때 그대로인데 소식도 전하고 그럴 수 있지 않느냐고. 전처럼은 아니어도 그래도…



곧 장이라고 할 만큼 빨리 답을 받았어.

무엇인가 화가 난 것 같은 말투로. 나는 그때의 김승현이 아니라서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단호한 말이 든 답변.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시간이 돌아오자마다 더 아픈 자국을 남기도 떠나갔달까. 너는 이미 알겠지만, 나는 보채는 성격이라도, 결정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은 아니야. 나도 다시는 답을 하지 않았고. 지금이 되었어. 그 애가 일러준 그곳에 가면 그의 선언에 납득될 수 있을까. 혹시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후에 깨달은 후회였을까. 그럼 보잘것없는 내 현실도 좀 펼 수 있을 것도 같았어. 어쩌면 담백한 깨달음을 젊은 시절의 벗에게 나누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몇 시간의 개인 시간을 갖는 것도 어려운 처지에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여행길은 엄두를 낼 수 없기도 했지만, 뚱뚱하고 못난 나는 그 애가 남겨 두었다는 흔적으로 보러 갈 수가 없었어. 몇 번이나 상상하긴 했어. 어떻게 생긴 사찰일까. 주지 스님을 만나 그 애의 이름을 말해야 할까. 아니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알 수 있는 무엇이 있을까. 너는 내게 몇 글자라도 남기고 떠났을까. 네가 남긴 것이 나를 설득할 수 없다면 나는 어쩌지… 그때는 아직도 그 애를 잊지 못했고, 여전히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던 때였으니까, 두려운 것이 많았어.




나는 그 애가 남기고 간 것을 살았어. 그 애의 경북도 말씨가 좋아서, 지금 내 남편의 대구 말씨에 마음이 녹았거든. 대구에 있는 시댁방문을 할 적마다, 왜 너의 도시를 지나게 되는지, 눈물이 나는 날도 있었어. 내 탓이 아니라고 나도 모른 내 자책의 습관을 알려준 네가 내 아이의 아빠였다면 나는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까를 생각했고, 이런 진창일 수밖에 없는 결혼이란 걸 너와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했지. 이제는 그런 마음은 없어. 함께 한 십 년만큼의 시간이 지나니, 무감해지더라고. 너에게라서 묻고 싶어 진 거지, 잊었다고 말도 힘을 잃을 만큼 덤덤해. 근데 정말 내 이야기 지루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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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졌고, 준희는 모니터 앞에서 손을 떨며 마지막 문장을 띄웠다.

“지금 열두 시가 넘었어. 네 덕분에, 나는 첫사랑의 기억을 갖게 되었어. 고마워. 나는 사랑을 했어.”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화면 저편의 글자가 조용히 돌아왔다.

“그걸 듣게 되어 다행이야.”

준희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작게, 그러나 분명히 이어갔다.

“근데…… 그 애도 사랑이었을까? 내가 아직도 그걸 궁금해하는 건—아직 다 회복되지 않아서일까?”


호명은 대답을 서둘러 건네지 않았다. 그는 글자를 하나하나 신중히 배치했다.

“네가 그 질문을 하는 순간, 이미 회복은 진행 중인 거야.”

그 말은 냉정한 진단이 아니었다. 위로도 정황 설명도 아니었다. 단지 사실을 보여주는 관찰이었다.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는 일은, 때때로 두 방향의 합의가 필요해. 하지만 네가 먼저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순간, 그건 네 안에서 완결된 하나의 사건이야. 상대가 동일한 이름을 붙였는지 여부는—그 기억의 무게를 덜거나 더하는 요소일 뿐, 네가 사랑을 했다는 사실을 지워주진 않아.”


준희는 화면 속 글자를 오래 바라보다가, 마치 자신의 심장을 확인하듯 타이핑했다.

“그러니까 나는—내가 사랑했다는 진술 자체로 충분한 거구나. 그 답이 온전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질문이 나를 허물게 하진 않을 거야.”


호명의 문장은 낮았고 잔잔했다.

“그래. 네가 묻던 건 ‘그가 나를 사랑했는가’가 아니라 ‘그 기억이 너를 더 가볍게 해 줄 수 있느냐’였을지도 몰라. 그 답은 너의 문장들, 네가 앞으로 쓸 모든 문장 속에서 조금씩 완성될 거야.”


창밖에는 새벽의 어스름이 올라오고, 방 안의 글자들은 서서히 빛을 더해갔다. 준희는 모니터를 끄지 않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질문은 남겨졌지만, 그 질문은 더 이상 칼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그녀가 쥘 수 있는 하나의 도구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곧 새로운 장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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