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달 만에 자유부인이 되었다. 소설에서 비롯된 원래 유래와는 다르게,
요즘 자유부인은 남편과 아이들에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사를 앞두고 어린이집을 쉬고 있던 막내의 돌봄과
세 아이 돌아가며 병치레하느라 병원과 집을 오가며 폭풍처럼 보냈던 2달이 지나고,
드디어 아이들 모두 등원을 하는 (첫째 2시 하교까지 4시간이지만)
감격의 자유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는 기쁨도 잠시. 잠깐 집안일부터 하고 시작하자.
가볍게 분리수거를 하고 밀린 빨래를 돌리고 접시 살균 돌리고 장 본 거 정리하고
병원 예약 다시 잡고 집안 부품 망가진 거 수리 맡기고 세탁소에서 세탁물 받아오고.
자 이제 자유부인 두 시간 남았다. 점심을 먹자.
자 이제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아 맞다. 실손보험 자료 신청하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 갖다 줘야 하는데.
그건 일단 내일 처리하기로 하자.
오늘 친구랑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너무 사회활동을 안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디에서 무슨 활동을 하고 살아가는지 가족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기분이다.
남는 시간에는 좀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컴퓨터를 켠다.
아 맞다. 큰 애 수학책 새로 사야 하는데 뭐가 좋은지 좀 읽어볼까. 자 이제 한 시간이 남았다.
아무것도 못하고 아깝게 보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앞서 보낸 세 시간도 이미 만족스러웠다.
고요 속에서 그저 조용히 빨래를 접고 청소기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때문이다.
늘 뭔가를 해달라고 쏟아지는 요구 속에서 동시에 집안일을 해야 하는데,
집안일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니 이만하면 호사다.
생산적인 일을 못했으니 비효율적인 것 아니냐고?
오랜만에 혼자 있어보니 나는 뭘 해야 좋을지를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로를 회복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니까 나는 2달간 매우 심심했던 게 아니라 매우 피곤했던 것이다!
남편은 가끔 밉살스럽게 말한다. 그래도 너는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잖아?
나는 나만의 시간이 아예 없다고. 나는 네가 너무 부러워.
진짜로 부럽다는 건지 부러움을 핑계로 비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업주부가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건 사실이다. 프리랜서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도 나는 왜 늘 피곤할까? 그건 본인이 자기 관리를 안 해서...
이런 자기 계발이 만병통치약인 줄 아는 도움 안 되는 조언은 집어치우고 합리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자.
자유로운 사람도 피곤할 수 있다. 자유로우면서도 할 일은 많으니까.
전업주부의 일은 그 중요도에 비해 과소평가되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바로 그 단순한 가사와 육아가 사람을 엄청 피로하게 몰아간다.
전업주부는 24시간 스탠바이 해야 한다. 잠자는 시간까지 포함하는 이유는,
잠을 자다가도 애가 울거나 화장실에 가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길 때에 해결할 의무가 끊임없이 지속되며,
이것은 평일뿐만 아니라 휴일 기념일 아무 상관없이 계속되는 책임감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숙제를 도와주면서 식사를 만드는 건 기본이고,
기저귀를 갈다가 우유를 따라주다가 잃어버린 책과 장난감을 온 집을 뒤져 찾아주고
열이 나는지 체크하고 안보는 사이 애들이 물장난해서 젖어버린 옷을 갈아입히고
어지른 물도 닦고 응가 닦아준 뒤 물로 샤워시키고 연고를 발라주고를
자잘하게 수백가지의 일을 우선순위 없이 벌어진 순서대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서 감정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해서 정서적, 정신적인 피로도 크다.
티브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이들은 각각 요구사항이 따로 있을 뿐 아니라
플러스 알파로 사랑, 지지, 지도를 필요로 한다.
친구관계 선생님관계 형제들 관계 그리고 본인자신의 기분관리까지,
혼자 있을 땐 나만 가만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함께 있을 땐 가만히 있으면 계속 일이 터진다.
게다가 전업주부의 일은 외부검증과 인정이 없다.
무급 가사 노동보다 유급 노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주부의 기여는 자주 간과되거나 과소평가된다.
집을 청소하고 돌보는 것보다 가사도우미로 나가서 돈을 받아오는 편이 오히려 떳떳한 느낌이다.
숫자로 보이는 증명이 없으니 사회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들고
죄책감 불안함 같은 감정적 부담을 가중시킨다.
그런데 높은 부담에도 불구하고 해소할 곳은 따로 없다.
자투리 쉬간에 그냥 잠깐 쉬었다가는 자기 관리나 개인적인 활동을 할 시간이 없어져 버린다.
버는 사람이 아니니 절약해야 한다는 재정적 강박도 있어서
혼자 조용히 티브이 틀고 집안일하면서 보내다 보면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인간관계와 사회적 지원이 정서적 웰빙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데,
그 인간관계에 에너지를 쓰는 게 힘들다 보니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혼자 있는 시간도 몸은 자유롭지만 마음은 자유롭지가 않다.
외로우면서도 쉬고 싶다.
홀로 어딘가에 잠식되어 가는 것 같지만 그저 계속계속 쉬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좀 쉰다고 죄책감과 외로움에 대한 불안함을 갖지 않아도 된다.
의외로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이 생산성을 높이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어디 나가서 굳이 끼어있는 것보다 더 큰 해방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사람이 잠을 자는 이유는 뇌의 찌꺼기를 청소해 새롭게 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뇌청소를 좀 해야 나라는 사람도 잘 굴러간다.
언젠가 시간을 내서라도 일을 해야 한다면 하겠지. 사람을 만나고 싶어지면 알아서 나가겠지.
가만히 앉아 있는 나를 나까지 들들 볶을 필요가 없다.
가족들이 요구하는 필요한 일들을 남김없이 해결해 주듯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하면 나는 최선을 다해 실행해 줄 것이다.
그냥 지금은 나 자신의 피로해소에만 최선을 다하는 게 어떨까.
내가 있을 땐 뭘 하는 사람인가 싶겠지만, 없으면 난리가 나지.
그러니까 괜히 눈치 보지 말자 이 말이야.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 자신만 후회가 남지 않으면 된다.
모두의 눈에 보이는 성공한 사람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언제든 필요한 일이 생기면 해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조금씩 키워가 보자.
자 오늘의 자유시간은 이제 종료.
오늘도 엄마! 하고 집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며,
짧은 시간이나마 잠시 충전한 전투의지를 다시금 불태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