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세스 윤 May 03. 2023

외동으로 키우다 연달아 둘을 더 낳았습니다.

삼 남매의 엄마가 된다는 것.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마가 될 거라 생각했다. 내가 꿈꾸는 막연한 가정의 모습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성취감을 느끼는 직업을 찾아 일을 하고, 가정적인 남편과 하하 호호 웃으며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가겠다는 진짜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24살에 만났다. 4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내가 막연히 꿈꾸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결혼생활은 상상 속 프레임에 갇힌 한 컷의 모습이 아닌 현실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부분 부분이 삭제되어 주마등처럼 아름답게 지나가는 장면을, 현실 속의 나는 모두 겪어야 한다. 물론 아름답고 즐거운 상황이 많지만, 대부분은 그 찰나를 살기 위한 길고 지루하고 조용한 날들의 연속인 것이다.






남편은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직장을 얻었다. 생각해 보니 20대에 결혼이라니 새삼 어린 나이다. 지방의 한 대기업에 취직하여 모은 돈도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서울에서 살던 우리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바로 이사를 했다. 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성취감을 느끼는 직업을 찾았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바로 임신이었다. 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안정된 책임감 있는 부모의 모습을 갖추기도 전에, 나는 전업주부가 되어 임산부의 생활을 시작했다.



임신 기간 동안 남편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내향적이기 그지없는 내가 혼자서 타지생활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고난 집순이였음에도 무거운 몸으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혼자 산책을 하고 티브이를 봤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했으니 대화를 나누기도 쉽지 않았고, 커리어우먼으로 즐겁게 사회생활 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다. 하지만 미래의 아이와 만날 날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도 굉장히 컸다. 그래서 좋은 기억으로는 남아 있다.



임신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시작단계일 뿐이다. 임신, 출산, 육아 중에 가장 충격이었던 걸 뽑으라면 개인적으로는 출산이다. 정말 허리를 전기톱으로 써는 진통을 10시간 동안 거치고, 차라리 누가 내 배를 갈라줬음 싶을 때쯤 생살을 찢고 아이가 태어난다. 출산의 공포는 이미 익히 들었지만 알면서도 충격이었다. 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나는 외동으로 하나만 잘 키우자를 다짐하게 된다.



내 출산 과정을 지켜본 부모님이 절대 외동을 강조하셨다. 출산과 육아를 하고 나면 여자로서의 인생은 끝이 난다는 것이 한국사회의 정서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육아의 끝없는 길로 진입하게 되었다. 얼마나 긴 길이냐면, 출산 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최소 10년 이상 계속될 것이라 본다. 어쩌면 평생 애프터서비스를 해야 할 수도.





너무너무 예쁘고 야무진 첫째 딸은 하루하루가 기쁨이다.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아이를 통해 세상이 환해지는 경험을 해 본 모든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내 모든 사랑과 관심과 체력을 쏟아부어도 하나도 아깝지가 않다. 앞으로의 내 삶은 모두 아이를 위해 바치겠노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육아도 역시나 한 컷 한 컷 사진처럼 예쁘게 지나가는 필름이 아니다. 새벽에 깨어나 어디가 불편한지도 모르게 꼬집은 듯이 울어대고, 엄마가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하면 치마를 붙들고 뒤로 넘어지고, 원하는 대로 일이 안되면 바닥에 누워서 울고, 원하는 모든 것 재미있는 모든 것을 엄마랑 같이 하고픈 시간들을 모두 옆에서 함께 지켜줘야 한다. 우는 아이를 재우느라 목디스크가 터지고, 이유식을 데우다 아기 울음에 놀라 팔을 데는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간다.



이쯤 되니 한 명으로 매우 충분했다. 엄마는 너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거야. 네가 곧 내 분신이고 아빠의 분신이니까. 참고로 아빠는 처음 회사에 적응하느라 보통 11시까지 야근 중이었는데, 그나마 쪽잠을 자는 와중에도 아기가 좁은 집에서 우렁차게 울어대니 거의 좀비가 되어 있었다. 임신 중에는 매일 깨를 볶았는데, 출산 이후 몇 번이나 피 터지게 싸웠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외동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아이가 6살이 되어가도록, 하나 더 낳아서 이걸 또 처음부터 시작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6살이 되니 딸이 동생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24시간 엄마랑 붙어있는 것도 좋지만, 귀여운 동생과 놀고 싶고 함께 나누고 싶다고 했다. 아마 주변 친구들의 형제자매를 보고 많이 부러웠나 보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 나만 혼자 집에 돌아가는 게 싫고, 외롭다고 했다. 절대 외동으로 키우겠노라 다짐했던 내 다짐이 흔들렸다.



그러던 중 어린이집 면담 중에 딸이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걸 불편해한다는 식의 말을 들었다.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다 보니 나누기 어려워하고, 친구가 조금이라도 룰을 어기면 극도로 싫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면담선생님은 굳이 ‘아마도 외동이라’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내가 확고하다면 상관이 없었을 텐데 이미 흔들리던 중이었으므로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아이를 데리고 음식점에 갔는데, 아이가 밥은 안 먹고 옆테이블 형제가 노는 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무너졌다. 우리는 그렇게 뜬금없이 둘째를 계획하게 되었다.





둘째 아들을 낳고 나니, 가족은 더 활기차고 즐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형제를 만들어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안다. 형제보다 더 좋은 게 부모의 재력일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 마음 한 편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그래도 당장 아이들이 잘 노니 행복을 느꼈다. 아마도 아들이 처음부터 우리 가족이었던 것처럼 당연시되었고, 서로 아끼고 깔깔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에 따스함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던 것도 잠시. 아들이 돌도 되기 전에 셋째를 임신하게 되었다. 아니 너무 안심을 했나? 이미 임신을 해놓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나 뒤늦게 상황판단이 되었다. 이제 나는 나이가 들었고 몸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항상 지쳐있고, 허리는 끊임없이 아프다. 둘에게 나눠줄 재산을 셋에게 나눠주면 뭐가 남기는 하는가? 하지만 피로감, 두 아이의 좌충우돌 육아, 36주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입덧에도 불구하고 나는 셋째 아이를 낳았고, 우리 가족을 완성하게 되어 기뻤다. (이제는 진짜로 그만그만.)






물론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장 어젯밤에도 막내가 밤새 울어서 잠을 설쳤다. 아이 하나일 때는 외식도 하고 여행도 많이 다녔는데, 대부분 집 앞바다와 산에서 시간을 보낸다. 첫째 딸과는 둘이서 오붓이 카페 데이트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셋을 데리고 공원에서 캔음료를 마셔야 한다. 애초에 부모의 체력 재산 관심을 셋으로 쪼갠다는 게 어렵고, 가끔씩 딸은 이러려고 내가 동생을 주장했나 찡얼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가 셋으로 나뉜 대신 형제애가 조금 추가되었다. 결혼을 하기 전의 내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얻은 교훈 중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적응력이다. 늘 밤샘 육아로 느리게 느리게 더디기만 했던 시간도 언젠가는 흘러 막내가 두 돌이 지났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은 아니지만, 세 아이의 필요와 욕구를 저글링 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유연하게 사용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다. 필요에 따라 우선순위를 바꿔 요구사항을 수용해주기도 한다.



둘째는 강박증 내려놓기다. 나는 내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경우 마음이 매우 불안해지고 짜증이 난다. 그러나 육아는 매사 좌충우돌이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기는커녕 그나마 돌아가게라도 만드는 것이 미션이다. 집이 어지럽고 빨래더미가 우뚝 솟아 있어도 애써 외면해야 하고, 장난감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워도 참아야 한다. 아이들이 행복하고 사랑받으면서 크는 게 가장 우선순위라는 걸 생각하면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마음으로 기도하며 살아간다.



셋째는 혼자인 것 같지만 아주 혼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는 첫째 아이가 동생들을 봐주고 도와준 덕에 많이 회복했다. 때론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지만 덕분에 이전의 외롭다 외롭다 노래는 하지 않는다. 친구들에게는 매번 동생들을 자랑하기도 한다. 늘 툴툴거리면서도 약속한 일은 딱딱해주는 남편과, 매번 전화해 주고 가끔 집까지 4시간을 운전해서 보러 와주시는 부모님. 그리고 늘 핫한 이슈로 카톡방에 재미를 던져주는 친구들까지. 그 작은 도움들 덕에 어찌어찌해나가고 있지 않나 싶다.





내가 나의 비전이나 계획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게 아니듯이, 외동이냐 다둥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아이들은 각각 나름대로 특별하며, 각각 외동인 거나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한 아이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른 두 아이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듯이, 내 인생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고 느낀다.



좋은 말로 애국자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사실 다둥맘들도 욕을 많이 먹는 세상이다. 능력도 안되면서 왜 낳아? 밖에 돌아다닐 때 주변에 피해줄 생각하지마!(아무리 조심을 해도 기본적으로 차가운 시선) 그럴 땐 마음이 심란하기도 하다. 애초에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완벽하게 키울 능력이 있기는 한가? 진심으로 내가 육아체질이고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딩크든 외동이든 다둥이든 정답은 없다. 그것은 머리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부모 마음 깊숙이 원하는 대로 해야 그나마 후회가 없는 것 같다.



육아는 혼돈 그 자체지만 그것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도 있다. 가끔씩 내가 무슨 생각이었나 자책하기도 하지만, 충격과 놀라움이 이제는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엄마가 되기 위한 여정이 우아하고 야무지진 않았다 하더라도 엄마가 되는 선택 외에 다른 길은 없었을 것이다. 이 길 위에서 완벽한 엄마가 되기 위해 하나도 빼놓지 않는 목표를 추구하기보다는, 예상치 못한 일들에 적응하고 탄력적으로 사랑을 많이 베푸는 다정한 엄마가 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니멀라이프의 서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