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엄청나게 바빴다. 이사 준비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다른 지역에 발령이 난 남편이었기에,
내가 아이들을 돌보며 이삿짐을 정리하는 역할을 해둬야 한다.
사람이 할 일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으로 일단 힘겨운 시작을 했다.
이삿짐센터와 날짜 정하기, 입주 청소, 아이 셋 전학, 전입신고, 모든 정기배달 정리하기.
많은 항목이 있겠지만 이사의 처음 시작은 아무래도 짐정리인 것 같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 일단 이삿짐센터가 견적을 보러 왔을 때
0.5톤이라도 적게 보이자라는 목표도 있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 짐들이라도 좀 줄여야 가벼운 마음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이것저것 버리기로 다짐을 했다.
자, 이제 버리는 순서를 정해보자. 내가 생각하기에
집에서 정리가 필요한 베스트 3 물품은 옷, 책, 장난감이다.
그 뒤로 탑 5에 주방용품 자잘한 소품들이 추가되는 데 일단 우선순위부터 접근하기로 한다.
베스트 3중에서도 순위를 매긴다면 장난감의 경우는 이사를 가는 마지막 날까지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으므로, 그리고 옷의 경우는 버리는 데 마음의 부담이 덜하므로
일단 책부터 버리기로 한다. 정확히는 책을 비롯한 모든 활자가 적힌 종이들이다.
책은 쉽게 버리는 편이다. 일단 내 책은 몇 권 남아있지도 않지만
풀어버린 문제집과 1년 이상 안 읽은 책들은 휙휙 정리해서 한편에 미뤄둔다.
문제는 그 외에 글자가 적힌 종이들이다.
우리 집에 그렇게 뭔가에 대한 사용설명서가 많은지 이번에 알았다.
병원 처방전과 영수증은 왜 이렇게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잔뜩 쌓아서 모아뒀을까?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서 받은 각종 유인물들.
게다가 아이들이 만들어온 그림작품 같은 거는 뭉클함까지 더해져 버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엄청난 양의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확인하여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골라낸다.
한참을 버리고 버려도 약 10cm 정도 두께의 종이가 정리되는데 이거 참 보람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괴로운 작업이다.
자, 이렇게 하루를 바쳐 겨우 프린트들을 싹 다 정리하면?
우리 짐의 500분의 1 정도는 정리되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수고한 나 자신에게 박수를.
다행스러운 점은 시작이 반이다.
놀랍게도 여기까지만 하면 마음이 굉장히 개운해진다.
이제부터는 줄이면 줄일수록 부피가 확확 줄어드는 물건들이라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한다.
다음은 옷을 정리한다. 일단 내 옷부터 버려야지.
옆에서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 큰 딸이 같이 돕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보니까 옷 자체가 진짜 없어도 너무 없다. 무슨 패셔니스타들이 옷장정리할 때
33가지 아이템만 남기고 버린다는 걸 보고 미니멀리스트구나 했는데,
나는 애초에 옷이 33벌이 안 되는 것 같다. 아 그래서 내가 평소에 단벌숙녀구나?
처음으로 뭔가를 정리하면서 오히려 쇼핑을 하고 싶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노올랍게도. 33벌도 안 되는 옷 중에서도 버릴 게 나온다.
특히 잡아이템들이 너무 많아서 추리고 추리다 보니 나름대로
3봉 다리나 되는 양의 옷을 정리했다. 종이정리보다 빠르지만 효과는 엄청나다.
비로소 옷장을 삐져나와 나뒹굴던 바닥의 옷들도 자리를 찾아
옷장 어딘가로 정리되어 들어갔다.
다음은 장난감이다. 자잘한 장난감들을 한 곳으로 모은 뒤
버릴 물건들은 분리수거하여 쓰레기통에 넣고, 남길 물건들은 수납장에 넣는다.
몇 달 전에 가지고 놀았다고 하더라도 최근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들,
혹은 새것이라 하더라도 연령에 맞지 않는 것들을 정리한다.
그런데 장난감이란 것은 꽤나 비싸거나 부피가 큰 것들이 있다.
이럴 땐 잘 닦아서 드림을 하거나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경우 마지막에 버린다.
사택에는 인사이동 시기마다 괜찮은 물건들이 버려져 있곤 하는데,
왜 이런 좋은 것들을 처분하나 했더니 이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을 처리하는 비용보다 가져갔을 경우 이사비가 더 나오는 것이다.
추억과 함께 이사 견적을 늘리는 것보단 실용을 선택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아까운 장난감을 버리게 되면 진짜 웬만해서는 더 사지 말거나 꼭 나눠쓰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 이렇게 짐정리가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마무리는 아니고 적어도 메인 작업은 했다고 해야 하나?
아직 나머지 추가항목들이 많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베스트 3을 정리하고 나니 집이 한결 깔끔해진 느낌이다.
사람도 일단 몸이 가벼워야 움직이기 쉬워지는 것처럼 집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이사의 첫걸음을 떼고 느낀 점이 있다면 이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쓴 글을 읽어보니 자,라는 단어를 몇 번을 쓴 거야?
이사라는 건 역시 기합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
그만큼 지치기도 하지만 스스로 어떤 열심히 서기도 하는 걸까.
삶과 물건을 정리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제 내 나이도 40인데, 그간의 짐들을 모두 이고 지는 것보다는
삶을 정리도 할 겸 앞으로의 의지도 다질 겸 좀 가벼워지고 싶다.
그런데 나처럼 무계획 P형 인간은 좀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불편하지만 그보다 몰려오는 당장의 피로함이 모든 생각을 누른다.
그럴 때, 이사를 가면 강제로 정리를 하게 된다.
이사비를 아끼기 위해서라도 삶이 강제로 가벼워진다.
게다가 짐을 정리하면 일단 개운하고 뿌듯하기도 하지만
내가 이만큼의 도전 과제를 해냈다는 생각에 효능감까지 높아진다.
짐이 줄어든 깔끔한 집을 보면서 테트리스의 조각을 모두 맞춘 건 같은 통쾌함을 계속 느낀다.
얼마 전 정리업체를 불러 300만 원을 내고 집을 정리하는 유튜브를 봤다.
사실 300만 원을 낼 수만 있다면 나도 너무 하고 싶었고 부러웠다.
하지만 돈은 없고 가진 건 의지뿐이니 천천히 시간과 공을 들여 홀로 하나씩 청소할 뿐이다.
어느새 한참의 노력으로 업체를 부른 것만큼 줄어든 짐들.
이 정도면 최소 30만 원어치는 해낸 게 아닌가 하고,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
이제 겨우 이사의 첫 단계인 짐정리를 시작했을 뿐이지만,
시작에 최선을 다했으니 끝까지 열심히 완주해보고 싶다.
5인가족의 대이동을 결코 만만하게 여기지 말라고.
결혼 후 이사가 벌써 6번째인데도 쉬이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분발해야겠지만, 또 맞이할 다음 단계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