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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 윤 Apr 30. 2024

비수기에 겨우 이사를 했다

드디어 이사를 했다. 드디어라고 하는 이유는

남편의 발령 이후 계속 뒤죽박죽 왔다 갔다 하는 사택 순번을 기다리다 겨우 집을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달에 이사를 하니 마니 기대와 실망, 부담과 허탈함으로 이사 준비만 3개월을 했다.

그러다 드디어 이사를 했을 때 안도감과 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다.

망나니가 목을 칠 때 이리저리 춤을 추며 사람 진을 다 빼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사 전에 가장 큰 스트레스는 바로 불확실성이었다.

이사를 앞둔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집에서 가구 하나라도 나가면 기분이 이상한데 이사는 말할 것도 없지."

아주 작은 변화 만으로도 사람은 통제력과 예측 가능성에 대한 상실을 느낀다.





그런데 하물며 아예 살아갈 터전을 바꾸는 데 기분이 어떻겠는가.

나 같이 생각 과잉인 사람은 이사 가기 전에도 이미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다.

새 동네도 현재만큼 안전하고 친숙한 느낌일까?

새 동네에 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병원, 학교, 이웃, 하물며 단골 가게까지 잘 지낼 수 있을까?

별 거 아닌 것부터 시작하는 걱정은 이사를 앞두는 시간 동안 점점 커져

그 지역의 분위기, 치안, 자연재해여부까지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한다.

게다가 3시간 거리 주말부부로 남편도 집에 없으니 혼자 세 아이를 보며 기분이 더 싱숭생숭한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안 올 것 같던 내 차례가 왔고,

언제 하나 싶던 이사를 결국엔 했다.

신학기와 적응기간이 다 지나가고 4월에 하는 비수기 이사였다.

성수기라는 이름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으므로 오히려 좋아! 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내 쓸데없는 걱정 퍼레이드가 그나마 의미 있는 실전에 돌입했으므로,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네?라는 기분이 들었다.



비수기 이사의 장점


비수기 이사는 나름대로 장점도 있었다.

첫째, 비수기에 이사하니 유명 이사업체들 시간이 비어 있었다.

배정받은 집이 구축이다 보니 도배를 새로 하고 이사 청소를 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열흘이었다.

가스를 넣고 도배를 하고 이사청소를 하고 새로 산 몇 개의 가구를 받고

바로 입주까지 일주일 안에 해결을 해야 했는데,

이사 시즌이 아니다 보니 다행히 예약이 조금씩 여유가 있었다.



둘째, 비수기에 이사하니 날씨의 제약이 조금 덜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여름의 무더위를 모두 피하고,

비교적 온화하고 좋은 날씨에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에어컨 설치 가스 공급 같은 것을 바로 신청해서 받을 수 있었는데,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 신청이 몰릴 때였다면 며칠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셋째, 비수기에 이사하니 성수기에 이사한 사람들에게 팁을 구할 수 있었다.

먼저 이사하고 적응을 마친 사람들이 간소화된 경험을 나누어 주었고,

인터넷은 어느 업체에서 단체로 설치해 보니 좋더라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 이사가 몰려있을 때는 어제 장거리 이사를 맡고 온 분들이 오늘 또 우리 집 이사를 하느라

이미 지쳐 계시거나 분위기가 어두울 수도 있는데,

시간적 여유가 있고 분위기도 가벼워서 부담이 덜한 느낌이었다.





나도 몰랐던 이사 스트레스


미리 걱정을 많이 해서 그런지,

비수기 이사라 비교적 술술 넘어가는 면 때문에 정말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사는 이사다.

분명히 머리로는 수월하고 괜찮다고 느꼈는데,

마음속으로는 나름대로 힘들었던 걸까?



나는 어차피 친구도 없고 서울에서 지방으로 시집도 왔는데,

이제 8년 정도 살던 지역을 떠나오는 데에는 아쉬움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들을 낳고 어린이집에 보내고 키우다 보니,

나름대로는 지역자체의 익숙한 환경과 지원에 길들여져 있었나 보다.

첫째를 아빠랑 같이 등교시키고, 나는 늘 익숙한 어린이집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 가듯이 나갔다 돌아오는 패턴이 나름 루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사라는 상황에서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영역을 탐색해야 하고,

아이들 모두가 새로운 학교와 어린이집을 가고,

새로운 등원패턴, 병원, 학원, 남편의 달라진 퇴근시간까지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가파른 학습곡선이 되어 부담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잘 해내야 된다는 압박감이 있었나 보다.

새로운 환경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고 친구를 사귀고 하는 것들이

그 전 지역에 있을 때보다 더 나은 모습이기를 바라게 되었다.

사람들도 친절했으면 좋겠고 시스템도 나아졌으면 좋겠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까지 기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딘가 빠르게 소진되어 갔다.





이사와 인생의 공통점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 사는 곳을 옮기면 정착을 해야 한다.

이제는 이곳이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가야 할 곳이다.

이사와 삶 모두 미래를 받아들이기 위해 과거를 놓아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사할 때 옛 집과 관련된 기억과 경험을 되새기듯이,

삶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과 통찰력도 되새기면서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의 생활도 정이 들고 많이 좋았지만,

끝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도 가능하다.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애착이나 기대는 어느 정도 정리해야 한다.

놓아주는 이 과정은 힘들고 매우 감정적으로 변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환경을 재창조하고 낯선 바깥을 향해 발을 딛는 과정에서

비로소 성장하고 더 큰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웃긴 에피소드


이사할 때 주의해야 할 점 한 가지!

행정복지센터에서 주소를 변경하고 우편물 주소를 변경하는 것과 다르게,

모든 택배물을 받을 때 새로운 주소를 잘 입력해야 한다.

택배가 옛날 주소로 잘못 가서 두 번 배송받는 멍청비용까지도 모두 이사 비용이다.

사람의 감정뿐 아니라 디지털 주소까지도 모두 새로움에 익숙해져야 한다.



샤워기 필터를 예전 주소로 잘못 주문해서 수거 후 재배송 받았다.

그러던 중 웃긴 에피소드가 있었다.

고객문의를 접수해 주시는 분이 다음과 같이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이 경우 기본 제품 수거접수 해드리고, 재출고해드려야 해서

왕복 배송비 6000원 입금으로 해주셔야 하온데, 괜찮으실까요?"



지나치게 공손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냥 오타인지 모르겠으나

6000원 입금에 왕대접을 받는 것 같아 빵 터졌다.

그동안 이사 스트레스로 긴장되었던 마음이,

작은 실수에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입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샤워기 필터는 생각보다 일찍 바로 다음 날 배송되었다.





뭐. 새로운 동네에서도 이렇게 재미있는 일들이 생길 것이다.

이전의 기억들이 흐려지는 것이 아쉽지만,

이곳에서도 새로운 사람들과 정이 들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쌓여간다.



뭐, 그러다 보면 지금 사는 이곳이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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