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나에 대한 고찰을 하는 타입은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끔씩 이게 진짜 내 모습인가? 싶을 때, 깜짝 놀라거나 순간 실망을 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체로 나를 평가할 때 좋은 모습으로 봐주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가급적 사람을 대할 때는 친절하고 성의껏 대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나의 본심이었던가?
얼마 전 전세 계약을 했다.
저쪽에서 먼저 계약금을 넣고 사인을 하면 내가 계약금이 들어왔는지를 확인하고 인증서로 사인을 하는,
차례차례 상호작용 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전산시스템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망가져서,
저쪽에서 계약금을 넣고 사인까지 했는데 내가 사인을 하기 직전에 서버가 다운되어 버렸다.
안 그래도 전세사기로 임차인들이 예민한 시기에 계약금을 받고 사인을 안 하는 사람이 되다니!
당연히 서버 관리의 기술적인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걱정이 된 임차인 부동산 쪽에서는 내가 틈틈이 서버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빨리빨리 사인을 해줄 것을 부탁해 왔다.
그러나 서버 복구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나는 10분마다 서버에 들어가서 확인을 했지만,
사인 화면이 도통 화면에 떠오르지를 않았다.
가뜩이나 다른 일로도 바빠 죽겠는데 이런 간단한 일마저도 문제가 생기다니!
마음이 급한 부동산 쪽에서는 5분 10분 단위로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계속 확인해 보겠다는 말과 함께 서버에 접속했지만 먹통이 된 화면을 보며 답답함이 극에 달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대기화면만 돌아가는 컴퓨터 앞에 앉아 2시간쯤 되었을 때였다.
이제는 서버가 활성화되지 않았을까 생각한 부동산 쪽에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에게 이렇게 재촉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나 역시 답답하고 스트레스로 가득 찬 상황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좀만 더 기다려주세요. 제가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사인하겠다고 입금확인문자까지 드렸잖아요?
저도 아무것도 못하고 여기만 매달려 있는데 너무 재촉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순간, 잠깐의 침묵 끝에 부동산 사장님이 사과하셨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나는 뭔가 아차 싶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분 정도가 더 지나서 서버가 복구되어 계약이 마무리되었다.
일은 겨우 마무리되었는데 자괴감 같은 불편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나는 고작 20분 때문에 더 기다리지 못하고, 나랑 같은 입장에서 답답해하는 사장님께 한마디 한 것인가?
애써 사람들에게 잘 대하려고 하는 마음이 꼭 이렇게 별 거 아닌 일로 불편함을 드러내고 어이없이 무너져 버리고 마는가?
역시 나의 본질은 진상이고 히스테릭한 쪽에 가까운 것 아닌가?
계약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아까는 내가 예민했음을 사장님께 사과드렸지만(그리고 매우 잘 받아주셨다),
그래도 어쩐지 한 단계 불편함으로 나아가버린 마음이 예전으로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반대로 중요한 순간에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바보같이 당하는 경우도 많다.
똑똑할 줄 알았더니 너무 저자세로 행동하거나 호구임을 지적받기도 한다.
슈퍼에서 500원짜리 물건을 사면서 만원을 내면 사장님이 귀찮을까 봐 필요한 물건을 못 사귀어도 하고,
중요한 타이밍에 걸려온 광고 전화에 화가 나면서도 지금은 받을 상황이 아니라 죄송하다고 사과한다(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담원이 대꾸도 안 하고 끊었다).
대형 쇼핑몰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4살,2살짜리 두 아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노약자와 유모차 전용 엘리베이터에 유모차 우선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 좀 길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뒤에 유모차가 와서 섰다. 아무래도 걸어다니는 우리 아이들보다 유모차가 우선이니까 먼저 타도록 비켜줬고, 뒤에 서 있던 커플은 딱히 감사 표시도 않고 내 앞으로 지나쳐갔는데 다시 보니 유모차에는 쌩쌩한 강아지가 타고 있었다. 불편을 감수하고 배려해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럴 땐 내가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과학책에서 본 것이 생각이 난다. 지구는 지각과 멘털 핵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도 지구처럼 몇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를 지나가며 잠깐씩 보는 사람들은,
나를 친절하고 온화할 것이라고 생각해 준다.
그건 내 나름대로 웬만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의껏 잘하려고 노력하고 조용히 묻어가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를 좀 더 가깝게 아는 사람들은,
나의 예민함과 까칠함. 낮은 자존감이나 히스테릭함에 대해 지적한다.
가족들이나 남편에게 지적을 듣고 나면 순간 뭐지?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좀 더 편안함을 드러내는 쪽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나의 그런 면을 불편해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눈치를 보면서 일방적인 배려를 이어나가야 하는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럼 나의 내면은 좀 더 못되고 불량한 쪽인가?
예민하고 강박적이고 불안하고 손해 보는 걸 매우 싫어하면서,
그저 사람들에게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으려고
상냥하고 털털한 척 위선을 부리고 있다는 말인가?
아주 작은 사건 하나에도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생각의 어딘가가 무너지면서 우울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가장 핵인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하지만 그 시도가 엇나갈 때마다
예민하게 굴고 까칠해지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의 일부이다.
그리고 매번 내가 똑바로 하고 있는 것 맞나 노심초사하는 것도 역시 나 자신이다.
다행히 이런 성격도 모두 좋아해 주는
아이들을 보며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아, 이런 상황은 절로 욕이 나오는데.. 부글부글 하다가도
애들 앞이니까 참자 이해하자 하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애들이 도화선이 되어 성질 폭발하는 경우엔 내 한계는 여기 까지는구나 깨닫기도 한다.
위선이 아니라 실제로 어느 정도 모두에게 잘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한테 불친절하게 구는 사람에게까지 잘해줄 정도로 헤프고 싶진 않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항상 노력은 해야 되겠지만,
내 성격은 이제 파탄이라고 너무 자괴감 가질 것도 없는 것 같다.
어느 정도는 다들 이런 고민하겠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자세도 필요하다.
애초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완벽할 것 같은 사람도 다 나름의 고민과 허점이 있다.
최대한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로 나를 이끌어가면서,
나는 나의 기준점이 어디인지 균형을 잡으며 가치관을 바로 잡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고민이 많고 불량하고 예민하지만,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계속 수양을 하는 수밖에.
그 모든 면을 가진 스스로를 항상 사랑할 순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