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세스 윤 Nov 24. 2023

내가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이유

나는 뭔가에 꽂히는 스타일이다. 남들은 세계 평화나 인류를 위한 위대한 발견을 하는데 에너지는 쏟는 동안, 나는 아주 쓰잘 데 없는 일에 꽂혀 몰두하곤 한다. 

주로 평상시의 루틴이나 내 생활반경의 변화에 대한 집착인데, 그 대상이 하도 사소하여 어디다 얘기하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오늘 아침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건조기에서 큰딸의 바지를 꺼내 수납장에 개어 넣으려는데, 바지끈을 딸이 잘못 묶어놓아 매듭이 단단하게 뒤엉켜 있었다. 

바로 이 순간, 매듭을 발견한 순간부터 나는 이것이 해결될 때까지 마음이 매우 불편해진다. 갑자기 모든 신경이 곤두서면서, 매듭을 푸는 데에 온갖 정보와 노력을 총동원한다.





그러고 보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자주 있어서 자중해야 될 정도다. 

최근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잃어버린 도장 하나를 찾기 위해 하루종일 온 집안을 다 뒤졌다. 집에 변기가 막혔을 땐 15분 단위로 변기 물을 내려가며 6시간 만에 겨우 뚫었다. 오후에 소독이나 as가 오기로 약속하면 왠지 오전부터 불편하다. 계좌이체를 하면서 혹시 금액이 틀리진 않는지 세 번 네 번을 확인한다.



이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네가 일을 안 해봐서 그래.

무슨 말씀. 나는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많이 해본 일도 쉬이 넘어가지 못하고 마음이 불안하다.

2천 명의 사람들에게 기념품 증정 일을 맡은 한 직원이 수건에 글자를 새길까 그냥 수건상자에 스티커를 붙일까로 2주를 고민하더란 얘기를 들었다. 지나치게 꼼꼼한 누군가의 에피소드를 듣고 실소했지만, 과연 내가 웃을 형편인가? 나도 비슷할지 모른다. 

나는 일은 대충 할지 몰라도, 그 증정품을 다 나눠줄 때까지 마음 한편이 책임감도 뭣도 아닌 이상한 무게감으로 눌려있을 것 같다.



이게 바로 강박인가? 별 거 아닌데도 정돈이 안되어 있으면 내내 찝찝하다. 그것만 해결되면 속이 시원해질 것만 같다. 그리고 바로 그 사소한 것을 해치우는데 나의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나를 들들 볶는 것이다.

대범한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 운동선수건 성공한 사업가건 수능만점 가건, 잘 나가는 사람들은 멘털관리의 고수로  여겨진다. 작은 일쯤은 툴툴 털어버리고 좀 대의에 집중할 순 없겠는가? 굳이 아까운 에너지를 그 찝찝한 티끌 하나 지우는데 모두 쏟아야겠냔 말이다.





내가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이유


머리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내가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건

대체로 마음이 불안정하거나 스트레스 상황일 때인 것 같다.

요즘 이사나 대출 같은 개인적이지만 나름대로 굵직한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이 있는데,

이렇게 변화와 도전이 어려울 때 나도 모르게 사소한 것에 더 집착하는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들로 머리가 복잡할 때, 평소의 루틴과 생활양식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불안을 해소하는 건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자주 마주치는 작은 것들은 예측 가능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며,

이는 마치 안전한 보호막처럼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를 지탱해 주는 일상이라는 갑옷불확실성이 주는 스트레스에 대항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일단 현실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고 묶여있던 천 쪼가리를 풀고 나면, 관련이 없지만 더 큰 범주의 일까지도 함께 잘 풀릴 것 같은 묘한 활력이 생긴다.



그리고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사소한 일을 해결함으로써 작은 성장을 이룩하기도 한다.

작은 도전들, 일상 속 작은 도전에서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며 삶의 지혜와 세상의 문제를 대하는 실마리를 얻는다. 거창하지만 의외로 작은 일들을 통해 문제 해결 능력을 강화하고, 자기 통제와 인내력을 키우며, 새로운 시각을 개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은 일이 나에게 지속적인 상식과 멘털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 주는 의미


사소한 것에 신경 쓰면서 점점 예민한 좀생이가 되어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가급적 긍정을 담아 좋은 의미로 생각하자면, 사소한 것 하나를 잘 풀고 나면 나머지 일들이 술술 잘 풀리기도 한다.



우리 삶은 크고 화려한 순간들로 채워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사소한 보통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사소한 일이 주는 의미는 대체로 사소하지만, 아주 가끔은 평소 당연했던 일의 소중한 부분을 새삼 발견해서 만족감을 준다. 

예를 들어 청소할 때 사소한 티끌만 정리해도 집안 분위기가 싹 바뀌는 것 같은 개운함이 있다.

평소에는 똑같은 집안 풍경에 별 생각이 없지만, 나만 알아보는 깔끔함으로 무장하니 작은 성취감이 느껴진다.





다시 바지 끈 얘기로 돌아가 본다. 유튜브와 블로그를 검색해서 여러 방법을 써 본 결과, 얇은 클립을 펴서

매듭 사이에 끼워 하나씩 풀어내는 방법이 가장 괜찮았다.

그렇게 나는 클립을 이용해서 겨우 바지 끈을 풀었다. 그러자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면서 뛰쳐나갔던

그 기분만큼이나 개운하고 홀가분해졌다. 그냥 두고 치워버렸으면 좋았을 일을 결국 해내버리곤 나만의 작은 성취감에 몸부림친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잠시 한숨을 돌리며 다음부턴 좀 더 대범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들수록 유치뽕짝하고 꽁냥꽁냥한 게 좋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