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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 윤 Jan 10. 2024

나이 들수록 유치뽕짝하고 꽁냥꽁냥한 게 좋더라.

얼마 전, 클리셰 범벅의 유치한 로맨스 드라마를 한 편 봤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서로 꼬투리를 잡고 싸우는데,

남녀 주인공이 아주 선남선녀라는 사실 외에 내용은 기억도 안 난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한심하게 누가 옳은지 따져가며 사랑싸움이나 하는 내용이었는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그 드라마를 보는 내가 실실 웃고 있더라는 점이다.



성인이 되면서 유치한 것들은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개그 프로는 대충 뒷이야기가 예상이 되고,

뭔 뜻인지도 모르겠는 밈을 계속 반복해 가며 낄낄 거리는 애들을 보면 이해가 어려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이를 먹어가며 다시 유치한 것들이 좋아지고 있다.

유치한 것의 묘미는 천천히 몇 십 년의 텀을 두고 곱씹어야 오히려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었던가?





우리 딸 또래의 초등학생이나 좋아할 만한 것들을 내가 좋아하고 앉았다.

한 가지 예로 로맨스 드라마를 봐도 고등학생 대학생 때는 남녀가 스킨십을 하거나

격정적인 장면이 나오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남녀가 아무리 부둥켜안고 19금장면이 나와도 심드렁하다.

오히려 유치한 말장난을 하거나 너무 뻔하게 멋진 척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꺄악 거리게 된다.

화면에 대놓고 꽃가루가 날리면 바보같이 빙구 웃음을 지으며 홀로 쿠션을 부둥켜안는다.



길을 걸어가는 우주복 입은 꼬마나 캐릭터 상품 같은 귀여운 것이 좋고,

작은 강아지나 꼬물꼬물 움직이는 소동물을 보면 너무너무 사랑스럽다.

사실 어렸을 때는 별로 가치를 모르고 무신경했던 것들이다.

영화를 봐도 자극적인 장면이나 기가 막힌 반전에 늘 감탄했다면,

이제는 완전 현실적으로 소소하고 티키타카 꽁냥꽁냥 하는 것이 즐겁다. 

훑어보기식이 아니라, 중간중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유치하다는 건 뭘까? 사전적 정의는 나이가 어리다 혹은 수준이 낮거나 미숙하다이다.

수준이 낮고 미숙한 게 오히려 편안하고 좋다? 

나이가 먹을수록 고차원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오히려 역방향으로 달리는 걸까?



인생의 모래시계가 쌓여가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진지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나이 값을 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벼움에 마음이 이끌린다.

나이가 들면 다시 그 가치를 깨닫고 재밌어지는 것들이 신선한 활력을 준다.



귀엽고 유치한 것이 좋은 이유?


유치하고 귀여운 것이 좋은 첫 번째 이유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점이다.

책임과 도전의 무게는 나이가 들수록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노화는 종종 건강 문제부터 상실과 변화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련을 느끼게 한다.

이럴 때 가벼운 마음을 유지하면 회복력이 강화되어 낙관적인 태도로 임할 수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가벼움을 선택하는 것은 강력한 스트레스 해소제가 되고,

정서적 강인함을 촉진해 삶의 어려움에 대한 적응과 해결을 도와준다.



애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귀여운 것이 좋은 두 번째 이유는 왠지 모성애로 접근하게 된다.

아기의 해맑은 모습을 바라볼 때 사람에게는 사랑호르몬으로 불리는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옥시토신은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인 동시에 감정적 유대감을 형성해 준다.

이는 귀여운 이미지나 상대를 봤을 때도 방출되는 것으로,

기쁨, 따뜻함, 애정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낸다.



옥시토신이 사랑호르몬이기 때문일까. 유치하고 귀여운 것이 좋은 세 번째 이유는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태도를 유연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귀여운 건 나 혼자보기 아까우니까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서 전파하기도 하고, 

나이를 초월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와 귀여운 것을 공유하면 마음이 한층 가까워진다.

게다가 유치한 것은 종종 성인의 일상에서 억눌린 창의력과 상상력을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장난스럽게 풀게 만들어준다.





키드(아이)와 어덜트(어른)이라는 단어를 합친 키덜트라는 합성어가 있다.

요즘은 이 키덜트 시장이 활성화되어 영화, 음악, 패션, 예술 등에서 활발하게 응용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꼭 이런 것들을 소비하는 집단을 따로 묶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내면에는 아직 성장하지 않고 순진함, 천진함을 가진 아이가 살고 있다.

정신적으로 퇴행한다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그 내면의 아이까지 포용한다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귀여움과 유치한 것들을 마음껏 누린다면 우리는 보다 즐겁고 의미 있는 삶을 창조할 수 있다.



무엇보다 꼭 그런 핑계가 아니고서라도 귀여운 것은 정말로 기쁨을 준다.

오늘은 좋아하는 걸그룹의 영상을 보며 잠시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의 사랑스러움이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고 불안을 줄여준다.



뛰어난 예술가는 마지막에 오히려 덜어내는 작업을 한다고 한다.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던 군더더기를 깔끔하게 정리해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가볍고 단순한 것으로 덜어내는 작업을 통해 풍부함과 깊이가 더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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