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Bukowski는 '나의 무료한 일상을 자극할만한 일이 일어나길 기대했으나,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처럼, 2023년 8월부터 2024년 1월 중반까지 내가 살아 숨 쉬는 24시간은 조직에서 원하는 '월급으로 환산 가능한 일' 그리고 '아침 8시 반 - 퇴근 시각은 알 수 없는 퇴근 시각'이란 둘레 속에 갇힌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심지어 2023년 12월 31일에서 2024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엔 단어 표현 그대로 '피가 곤할 만큼' 지쳐서 소파 위에 잠들고 말았다. 깨어보니 그때는 이미 2024년 1월 1일 새벽 2시. 피폐함이라고 여기는 것조차 사치였다. 상상은 이미 까먹은 지 오래고, 사지육신이 피곤하니 뇌와 마음 그리고 신경 모두 만사가 귀찮다며 '상상'이라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즐겁게 여기던 활동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계절이 바뀌지 않는 적도 밑 남반구에서 살아가니, 시간의 흐름도 의식하지 못한 채 마치 1년이 5년 같다고 느낄 뿐이었다. 단조로움이 주는 안정감은 때로는 이상한 죄책감을 부여하는 게으름이란 죄명이 되어 마음의 동요든 뇌파에 자극을 주는 도파민이든 그 아무것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마비의 상태에 접어들곤 한다. 이게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게 때론 더 무서웠다.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룹활동을 몸서리 칠 정도로 싫어했고, 학교라는 공간은 마치 경험조차 못 해본 감옥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고, 만약 누군가와 같이 시간을 보내거나 한다면 그 '누군가'를 타인의 강요 없이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도 단단한 마음을 같지 못한 나라는 존재는 '혼자'라는 틀에 갇혀 '같이'하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거부하며 피했다. '같이'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단어였고, 지금도 그렇게 좋아하는 말은 아니다. 마치 어렸을 때 먹고 엄청 체해서 듣기만 해도 구역질 나는 것처럼 '같이'는 그런 말이었다.
그래서 '혼자'와 '고립'을 고독으로 포장하며 온전히 혼자 있는 것, 아니면 군중 속에 혼자 지내는 시간을 계속 늘려갔다. '혼자'는 마치 갈수록 심해지는 짝사랑의 감정처럼, 아니 아무하고도 감히 공유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감정이랄까. 그 누구에게도 뺏길수 없는 혼자의 상태가 그리웠다. 그래서 2024년 1월 20일, 혼자서 온도가 30도 이상 차이나는 피부가 찢어질 듯한 차가운 공기가 잠식한 서울로 훌쩍 떠났다.
서울은 추웠다. 무려 마이너스 10도에 달하는 한파는 우울감도 얼릴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닌 외부충격이었다. 수개월간 연락을 기다렸던 그 한 사람을 원망하고 그리워했던 마음도 동결시킬 정도의 강력함은 생존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대의 과제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나는 무료한 일상에 결과는뒷전으로 여긴채 파문을 일으킬만한 강력한 자극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파의 강력함, 골목사이를 세차게 가로지르는 겨울바람은 나의 오감을 깨우는 아름다운 곡주였다. 그래서 매일같이 거리의 소음을 차단하려고 귓구멍에 끼웠던 이어폰을 집어던지고 겨울바람을 배경음악으로 삼아 꽁꽁 언 겨울 바닥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거리의 자동차 소리에 온전히 집중했다.
겨울이 주는 경각심이라고나 해야 할까. 거의 4년 만에 느끼는 혹독한 겨울은 나에게 아름다운 자극이 되었고, 이런 자극을 충분히 느낀 채 다시 적도 밑 혼잡한 도시로 돌아왔다.
이 도시를 떠나면 그립지 않다. 한국에 오래 산 외국인들에게 '한국이 왜 좋아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질문 자체가 한국을 이미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 사는 게 아니냐.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이냐 이렇게 묻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나는 질문의 전제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이 한국이란 나라에 사는 이유는 그냥, 또는 어쩔 수 없이, 아니면 어쩌다가 사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 좋아함을 강요하는 것은 억지인데, 이러한 억지는 '같이'만큼이나 내가 구역질 날 정도로 질색하는 행위이자 말이다. 나 역시 우리나라에 지내는 외국인들과 피차 마찬가지기 때문에, 자카르타를 딱히 좋아하거나 그리워할만한 이유는 열거하기 어렵다. 솔직히 말해서, '없어서.'
2024. 1월, '자극'을 되찾았다는 점을 하나의 기쁨으로 생각한다. 이 자극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글을 다시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어서 고맙게 여긴다. 아직도 정돈이 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찌 되었든 '글'이란 것을 쓸 수 있어서 2024.1월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