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더위가 하풀 꺾일 때쯤부터 전주꽃심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독립출판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브런치북으로 연재 중인『손끝의 발버둥』이 막바지에 이르러 독립출판의 비정기간행물로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러다 문득, 아니! 문득이 아니다. 늘 머릿속에 액자처럼 떡하니 걸려있던 질문이다. 칼 같이 반듯한 강사의 물음에 직면하다 보니까. 유종의 미(?)는 얼어 죽을, 답이 정리가 안되고 빽빽하게 꼬여버린 느낌이다.
"『손끝의 발버둥』이 책으로 만들고 싶은 이유 있어요?"
" 뭐 독자나 세상을 이롭게 할 내용이나 이유는 같은 건 없어요, 없지만......."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내 글이 좋은 글인가? 사실 이쁜 책을 만들 자신이 없다. 재미있게 지어낼 자신도, 치밀하게 이야기를 설계할 자신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내보일 자신이 없다.
연재의 마지막쯤 와서야 왜 "굳이"란 생각이 들까?
독서란이란 지식의 축적 외 감정과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행위라고들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같은 문호들의 비슷한 의견을 내보였다. 다행인 게 언급한 작가들의 대표작쯤은 읽었던 것 같다. 다만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권밖에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읽었다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사실 읽지 않은 셈임을 모르지 않으나, 별 쓸데없는 합리화 따위로 열등감을 제친다. 어쨌든, 독서란 의미 앞에 한껏 위축되고 만 것이다.
반대로 지식의 축적 따위는 무슨, 감정과 상상력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축소하는 행위라고 하면 어떨까? 독자들이 찾겠니? 여러 부정적 의문이 꼬리를 물고 물리고 있다. 이럼 독서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결국 책은 독자가 독서란 행위를 하는데 필수 성립조건이므로, 내가 왜 주저리주저리 구시렁구시렁 시부렁시부렁 투덜투덜 대고 있는지 고민을 하는 건 마땅히 해봄 직하다. 이상한 말이지만, 끝이 없는 고민의 끝에는 거의 체념에 가까운 마음으로 닿아있다.
여전히 자신 없으며, 아직도 의심스럽고, 변함없이 수준이 낮고, 한결같이 관념적이고, 했던 말이나 어디서 들어본 직한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관념이 떠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다시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과 다른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 보자는 결심의 방점은 퍽이나 찍어야 하지 않나.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과 보살에 가까운 독자들을 만나 그저, 썩 무던한 킬링 타임(killing time. 시간 죽이기)이 되길 바랄 뿐이다.
또 왜? 되돌아오는 질문(質問) 앞 초인종을 끄고, 질문(質問)을 질문(質門)으로 바꿔 목차 하나, 한 페이지 더 서성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