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다를 게 없다 VS 조금만 달라도 차이는 크다
손끝의 발버둥의 연재가 막바지로 치닫는다. 아마 대여섯 편 안으로 브런치북 연재가 마감할 것 같다. 불현듯, '나'를 드러내놓은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그다지 구체적으로 사건이나 일화를 담지 않았단 생각이 든다. 구체성은 조금 의도한 바 있지만, '나'는 '나' 전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연재하는 글 속 화자가 '나'가 아닌 바로 '손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은유적으로 '손끝'이 '나'인 셈이지만, '나'로부터 출발한 시선과 '손'으로부터 시작하는 시선은 같은 말을 해도 울림이 다를 거란 생각 때문이다. '손끝'이 지니고 있던 특수성을 매력화하고 싶었던 마음도 큰 탓도 있다. 화자 '나'에게 '손'은 결핍이지만, '손'에게 '나'는 끝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명료화하여, 닳거나 쓰거나 방전되는 생의 어떤 동력인 셈이니까. 그럼 글에 대한 전반적인 주제 또한 그다지 무겁지 않으며, 메시지나 키워드가 확장되는 기분이 든다. 문제는 구체성인데, 고민이 인다.
'손끝'이 발버둥 칠만큼 절실하려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어디까지 보여주어야 할까. 과연 당신은 손끝의 발버둥 따위에 호기심이나 관심이 있을까? 특수성을 매력화 한다는 건 결국 '보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일 텐데, 남들과 다른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들과 똑같은 그저 다 하는 이야기일 텐데 같은 고민이 장마처럼 비를 뿌리듯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비가 잠깐잠깐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먹구름 사이로 비친 햇빛에는 "아무리 달라도 별로 다를 게 없다." 같은 염세가 들친다는 것.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 속 궁극적으로 역설하고픈 욕망일지도 모른다. 여기지만, 뭘 또 그리 거창한지 피식 비웃음이 새어나온다.
"아무리 달라도 다를 게 없다."
자기혐오까진 아니더라도 자기 비하를 선수 치면서 타인에게 위로를 강요한다. 되돌아오는 건 위로가 아니라 개평을 내던지듯 차가운 적선일지도 모르는데, 안일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욕망이다. 나는 의수다.라고 밖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