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렵게 말하느라 애썼다.
손끝의 발버둥이라 했다가 갑자기 발이란 말에 헛바람을 삼킨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니, 둘러보지 않아도 내게는 발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뭐 태어날 때부터 없는 건 아니고, 살다가 없어진 탓에 발의 기억은 고스란히 대뇌피질에 남아있다. 왜 없어진 건지,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어쨌든 손이 하는 일에 발이 간섭한다는 게 거슬리기도 하고, 시적 허용 따위! 궁색한 말장난이 좀 유치하고 허섭한 게 아닌가! 하는 현타. 속수무책 곤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적절한 비유가 아닌가? 위안을 되새김질한다. 위안 따위! 일련의 행동이 발버둥란 생각이 미치차 키득키득 웃음이 난다. 흔히 그림을 너무 못 그리면 발로 그린 게 아니냐고 하는 것처럼 손과 발은 연관이 깊다. 도무지 ‘잘 그렸다.’ 할 수 없는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는 고집과 그 고집 속에는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르고 싶은, 소심해도 절실만은 짙게 묻은 욕망이 발버둥이란 말이 아주 잘 감싸고 있는 게 아닌가!
계속 되새김질하다 보니 이상하게 나름 흡족하기도 하고, 혼자 또 미친놈처럼 키득거리게 된다. 그건 순전히 손과 발의 대칭어에 관한 안도이지 그림 실력에 대한 건 아니다. "손이 아니라 의수라서" 하는 위로나 격려는 딱히 마음에 차지 않는다. 이미 세상에 손은커녕 발, 심지어 입으로 그리는데 손 못지않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놈의 재능이란 건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새삼 뼈저리게 체감한다.
그렇다고 불평을 해봐야 되돌아오는 건 차디찬 현실일 뿐이다. 그 현실을 딛고 살아가거나 살아내는 일련의 행동이 발버둥으로ᅠ 수렴(收斂)된다. 다행인 것은 뭉툭하고 투박하지만 펜을 잡고 타자를 치는 손끝은 존재한다는 것. 어쩌면 발버둥조차 담아내기 힘든 첨예하고 호젓한 의수란 배경은 언어를 관통할수록 생사를 앞다투는 것만큼 처절하다. 끝없이 고민해보려 한다. 발버둥 전에 손끝을 거슬러 올라가 장애란 몸에 무엇이 또 침잠되어 있는지 휘젓는다.
종합해 보면 손도 없고 발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새삼스레 그렇다. 손은 의수가 대신하고 발은 휠체어가 대신하는 것처럼 누구나 어떤 결핍을 다른 적절한 걸로 대체해 본 경험이 있는 흔하디 흔한 클리셰. 클리셰가 잘 녹아든 사소하고 심심한 글과 간결하게 일필담묵(一筆淡墨)한 낙서를 모으다보니, 하릴없이 손끝의 발버둥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