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여행을 계획한 후 오래 묵어야 할 숙소인지라 인터넷 검색도 병행하고 직접 안주인과 통화도 시도했다. 너그럽고 그러면서 푸근한 목소리로 안내하신다. 간단한 식사 정도는 조리 가능한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그리고 연밭 또한 내 마음을 끈다. 연잎. 구해오리라. 연엽주를 담고 연잎밥을 하리라. 하기야 이 집에서 여섯 밤을 보내야 하니 다른 것도 중요하리.
새벽 어스름 녘에 집 앞길을 한 바퀴 돌다. 잘 정돈된 집들이 마을 길과 함께 정갈하다.
어제저녁에는 안 계시던 바깥 어르신이 먼저 식사하셨다며 우리만 먹게 됐다. 내일 아침은 겸상하시자고 권해놓았다. 나는 어른들과 잠깐의 대화로도 그분의 깊이를 알아본다. 시골에 계신 지긋이 나이든 어르신. 그분들 사이에서 우리의 정신적 지주는 존재한다. 아들 며느리에게 적당한 노선을 지키고 조상을 모시는 것에도 나름 소신을 갖고 계신다. 문중의 일과 마을 일도 병행하시고 하룻밤 묵어가는 길손에게도 당신의 인품이 엿보이게 한다. 나는 그분의 멋스러움을 금방 알아봤다.
무엇보다 그분은 내 초임지의 곽 장학사님을 알고 계셨다.
두 분의 성을 본떠 지었다는 ‘임이랑 농장’의 상호는 짐짓 아닌 척하나 ‘내 임이랑’이라는 것도 알아챈다.
밥반찬으로 나오는 음식이 정겹다. 파를 데쳐 돌돌 말아 양념장에 찍어 먹는 파 숙지, 우리 방 앞마당에 거적을 둘러친 곳에서 자라는 표고버섯볶음, 서로 떼주면 안 된다는 깻잎장아찌. 삼 년 묵은 배추김치, 아침에 쑤셨다는 도토리묵 무침, 대밭에서 직접 수확하신 죽순 무침, 여자만 꼬막무침, 꼴뚜기 젓갈, 말갛게 볶아낸 멸치볶음, 알맞게 익은 홍갓, 그리고 민어 튀김과 소고기 듬뿍 썰어 넣은 미역국 등이 영락없는 엄마 밥이다. 이른 일곱 시의 아침이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이다.
하루를 지내고 나는 나의 혜안을 믿게 됐다.
'배추 김장 천 포기를 어디에 쓰는걸까?' 필시 나름 유명한 김치찌개집 일거야.'
밭에서 직접 심은 배추로 손수 담가 한 곳으로 납품한다고 하셔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고객은 그분의고객에게 선물로 돌린다고 하는 대답에 더는 묻지 않았다. 벌써 몇 해째 그러하시다니 믿음 그 자체다. 아침상에 나란히 놓인 3년 묵은 배추 김치와 1년 묵은 배추 김치를 선보인 내게 냉장고와 냉동고를 보여주신다. 온갖 농작물의 수확물들이 다 들어있다. 가공을 준비하는 저장물과 내다 팔 신선채소와 온갖 밭작물의 종자....다행히 내가 원하던 연잎과 연꽃 말린 것도 있다. 잠깐 아는 체하는 내게도 넉넉히 내어 주신다.
어느 아침, 간이 전동차를 타고 당신의 전답을 자랑하고픈 안주인을 따라나섰다. 아직도 너른 밭들에는 푸른 채소가 가득하다. 온 밭에 가득한 배추는 끝간데 없이 계속된다. 아직 파란 쑥은 떡으로 만들어져 지인에게 보내질 것이다. 보리와 땅콩은 물론 마늘과 양파, 고추나무, 대파와 홍 갓등 김장 부재료가 가득하다. 이들은 모두 나이 든 억척마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당근과 파는 일정량씩 다듬어 읍내 로컬마켓으로 출하한다고 하셨다. 저녁 무렵 비닐 포장을 하는 작업을 도와드렸다. 깨끗이 씻은 당근을 저울에 달아 서너 개씩 소포장하고 대파도 500g씩 긴 비닐에 가지런히 넣는 작업이다. 덕분에 금방 끝났다며 좋아하시는 것을 보며 언제까지나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농촌 일은 끝도 없다. 나처럼 숙련된 보조는 긴히 필요하겠으나 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소중하다.
한가지 문제점은 시간이 갈수록 하염없이 정이 든다는 것이다. 나는 숙소와 정이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