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노 가는 길
나의 망각 곡선은 지대하고 나의 잊음성은 대단해서 노노로 가는 길에 더욱 그렇다.
첫 환승역에서 2호선 쪽으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는 벌써 일주일째 수리 중이다. 다른 쪽을 알아보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일주일째 같은 자리 그 위치에 내려 그곳 계단의 막막함에 직면한다.
14개 계단 4개참을 올라가야 하던 첫날, 후들거리는 다리와 가슴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아내느라 한참 동안 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했다.
적응은 무서운 것이어서 며칠 만에 계단 숫자를 세며 앞사람의 엉덩이를 말없이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힘겨워 보이는 중년의 어르신은 커다란 비닐봉지에 한껏 뭔가를 가득 넣고서 서너 걸음마다 쉬기를 반복한다. 이때 젊은이 하나가 짐을 번쩍 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올라가 계단참에 살짝 내려놓고는 총총히 사라진다. 부산스러운 발걸음 사이로 고맙다는 인사가 울려온다.
나는 여학교 때 통학 기차역에서 내려 다시 강 다리를 건너 30분을 걸어야 했으나 같은 남학생을 두 번 본적이 없다. 지금도 한번 간 길은 끝까지 그대로 그 길로만 간다.
노노로 가는 길은 변화를 주기로 한다. 이는 다른 건 돌아보지 않고 보낸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주변도 휘휘 거리며 세상 밖 구경을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보도 살피는 그런 의미이리라.
나의 아침길은 집에서 30분쯤 걸리는 첫 환승역에서 2호선으로 바꿔 타고 다시 9호선으로 도착하기도 하고, 4호선과 5호선 보통열차로 바로 가기도 한다. 어느날은 1호선 특급을 타고 노량진역으로 간 다음 보통열차로 바꿔타기도 한다. 그렇게 김포공항 근처 목적지에 도착해서 키오스크 출결 신고를 한다.
이리 가면 어떠리 저리 오면 어떠리 조금 늦으면 어떻고 좀 일찍 도착하면 어떠리.
자리에 앉으면 조금 멀리 가도 좋고 앉지 못하면 빠른 환승역에서 내린다. 전철이 늦게 와도 좋고 앞차와의 간격 조절이어도 좋다.
돌아오는 그것 또한 역순이긴 하나 마음은 한결 가볍다. 출석 체크용 키오스크가 없는 것이 그렇고 가는곳이우리 집이라는 것이 행복하다. 저녁 메뉴 생각만으로도 좋고 나를 기다릴 그를 생각해서도 좋다. 노노수업을 마친 이때 한편의 글이 완성된다. 그만큼 할 말이 많고 울림이 있는 수업의 연속이다.
오늘 와인수업. 워커힐 호텔 셰프님이 강사로 오셨다. 다만 모르겠다. 경험없는 경험이 오늘 또 소중하다. 하기야 그 어떤 술도 마시지 않으니 술자리는 당연히 부담스럽긴 하다. 오늘은 입학 첫 기념으로 주최 측에서 서로를 알아갈 자리가 마련되었다. ‘기필코 마시지 못하는 티를 내지 말자.’라고 다짐하지만 어김없이 쉽지 않다. 술자리가 무르익을수록 내 앞의 위인들은 텐션이 높은 다른 자리로 옮겨가고 내 앞자리는 조용한 사람으로 채워진다. 다행인 건 술자리에 따라 내 앞의 자리가 비어버리는 일도 있었으나 이번 자리는 촘촘한 자리 배치 덕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좋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에 가고 싶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말한다. 술을 못 해도 오랜 직장생활이 가능했던 걸 고마워하라고도 하고 비슷한 음료로 티 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도 한다. 폭탄주를 멋지게 말아 한 잔씩 돌리는 여생도는 그 인기가 대단하다. 심지어 나는 공감하지 못하나 ‘이쁘다’라는 찬사도 듣는다.
그러나 따라 하고 싶진 않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술 못하는 고충을 오늘도 한껏 누린다.
귀로, 멀리 이사 예정인 친구를 잠깐 만나야겠다. 동작 4호선, 친구도 4호선이다.
학생 때도 말없이 전학 가는 친구에게 상처받았고 지금도 이사하는 친구가 아쉽다.
하기야 전철 한 시간 거리에서도 만나기 어려웠고 이사를 하면 두 시간 거리라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지근거리의 친구는 통화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