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 이게 최선입니까?
요즘은 나보다 드라마에 진심인 우리 남편이 즐겨보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방영 시간이 내가 주방에서 저녁 설거지를 하는 때라 늘 놓쳤는데,
얼핏 보니 예쁘고 똑똑하고 앞날이 창창한 고등학생이 임신을 했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도 모르게 쌓인 설거지 더미를 뒤로하고
앞치마도 벗지 않은 채 남편 옆으로 가서 앉았다.
제주도가 지긋지긋한 이 소녀는 제주를 떠나 서울로 대학을 가기 위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다.
완전 똑 부러지고, 시크하다. 그리고 이제 곧 그 꿈은 현실이 될 예정인데 갑자기 임신을 한다.
한 숨을 쉬고 혀를 끌끌 차며 드라마 속으로 빠져드는
내 옆에 중년의 남성을 보니 놀리고 싶어 죽겠다.
"뭐야? 내 말엔 공감을 못하면서. 드라마 보다가 여성 호르몬 폭발한 거야? "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라도 빠져들 소재다.
물론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지만, 이건 드라마고 세상을 향해 뭔가 말하고 싶은
어떤 이들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여성과 소수자에게 아주 진보(?)적인 넷플릭스가 우리나라에 상륙한 지 얼마인가?
이제 우리는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받고 배우가 수상의 영광을 누린다. 심지어 그들의 수상 소감에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깔깔 웃고 박수를 치는 그야말로 K 문화 선진국이 아닌가!
설마 태아의 심장소리 듣고 모성애 폭발하고,
출산만이 사랑의 운명적 결말 인양 판타지 작렬하고 그러 진 않겠지?
그래, 한 번 보겠어! 진짜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팔짱을 딱 끼고 봤는데,
아! 야속하게도 이 드라마는 흔들림 없이 딱 그렇게 흘러갔다.
뭐야 1980년대 드라마에서 본 듯한 이 신파 스토리. 리모컨을 던지고 싶었다!
저 똑똑한 아이가 서울로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적할 백신도 만들고,
사회에 이바지하고, 돈 벌고, 꿈을 펼치고!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제주도에서 아기를 낳고 엄마가 된다? 그다음은?
설마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아기는 아기 침대에 혼자 누워 방긋방긋 웃기만 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건 무려 23년 전 일이다.
드라마 초반에 나왔던 그 당돌한 눈빛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4주 전 일이다.
남편의 코로나 격리 마지막 날 새벽, 둘째 아이가 내가 자고 있는 방의 문을 열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화장실에서 발가락 부딪혔는데, 아프다가 괜찮지가 않고 계속 아파..."
엄마가 되면 반 의사다. 걷는 폼에서 느껴지는 골절의 기운.
날이 밝자 선생님께 알리고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정형외과로 갔다.
환자가 대기실에 가득하다. 20대 여자는 물론 교복을 입은 10대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까지...
이것도 팬데믹의 영향인가? 대기시간은 길어지고, 아이 얼굴엔 짜증이 가득하다.
오늘 아침 1교시는 체육으로 무려 티볼을 한다며 잔뜩 기대를 했는데 새벽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나? 나도 짜증이 났다.
1학년 때 팔 골절, 3학년 때 발 골절. 딸은 이미 두 번의 골절이 있었다.
다친 당사자도 물론 힘들겠지만, 뼈가 붙을 때까지 엄마가 담당해야 하는 일이 어마어마하다.
목욕부터 옷 입히기, 어디 데리고 가기, 공부시키기 등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는 게 '골절'이다.
엄마의 고생문이 활짝 열리는 거다.
결국 내 예상대로 골절 진단이 내려졌다.
다행히 수술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곧 짜증이 났다.
이른둥이로 낳아서 골절이 잘 되나? 죄책감도 밀려왔다.
죄책감이 있든 없든 어쨌든 엄마인 내가 일정 기간 아이의 부족한 발걸음을 채워줘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에게 죄책감이 있다는 거다. 아마 더 열심히 엄마 노릇에 매진하겠지.
그만큼 짜증도 나겠지. 엄마가 되면 모성애가 매일매일 폭발해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엄마도 짜증이 난다.
아이를 부축하고 학교를 등하교를 시켜보니 이건 정말 도저히 못할 일이다.
불안한 걸음걸이에 멀쩡한 나머지 다리까지 위험해 보인다.
이미 골절된 발가락이 아예 잘못되면 수술까지 해야 할 텐데, 그것도 막아야 했다.
고민 끝에 휠체어를 주문했다.
휠체어가 도착하고, 아이를 휠체어에 태워 등, 하교를 시켰는데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낮은 턱도 그냥은 넘어가지지 않는다.
길에서 종종 만나는 배수로 덮개에 앞바퀴가 빠지면 답이 없다.
계단을 만나면 안 된다. 무조건 평지로 된 길을 찾아 빙빙 돌아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 아이는 코로나 기저질환이 있어 가정 급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맞춰 차에 점심 도시락과 휠체어를 싣고 학교로 갔다.
아이를 주차장으로 데려와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였다.
이런 걸 구구절절 쓰는 게 좀 구차해 보이긴 하지만 이걸 어디 써놓기라도
해야겠다 싶어진 건, 며칠 전 우리 아이가 나에게 했던 말 때문이다.
"엄마 나는 1학년 때 일도, 3학년 때 일이 기억이 안 난다! 하나도!"
무슨 일이야? 그.. 그걸 기억을 못 한다고? 깁스 한 팔을 랩으로 감고 엄마가 머리 감겨주고 씻겨준 걸
기억 못 해? 육아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인가? 아이가 기억을 하든, 못하든 엄마는 엄마 노릇을 해야 한다. 엄마가 된다는 건 이런 거다.
이런 걸 알고 아기를 낳겠다고 결심한 건가? [우리들의 블루스]의 현이와 영주. 그 아이들.
태어나 돌까지는 엄청 중요한 시기라 가능하면 엄마가 아기 옆에 있는 게 좋을 거라고 한다.
그럼 초등학생이 되면 엄마 손이 덜 필요한가? 솔직히 초등학교 저학년 땐 하루 서너 시간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는데, 당연히 엄마 손길이 더 필요하다. 그럼 고학년은? 이제 정말 엄마가 필요 없나?
한참 친구 관계 힘들어지고 공부도 어려워진다. 그 복잡한 마음 나눌 친구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친구
사귀기는 쉬운가? 요즘 아이들은 내가 예전에 클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다. 엄마라도 옆에서
괜찮다고, 잘 될 거라고 말해줘야 한다. 피자나 닭봉 같은 냉동식품을 에어프라이어에 돌려주거나
떡볶이, 라면이라도 끓여주며 다독여줘야 한다. 내 아이 마음을 꼬집은 그 아이, 함께 욕도 하고
이해도 해보고 하여간 이거 저거 다 해봐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다.
중학생은 엄마가 필요 없나?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중2병 걸린 수십 명의 아이들이
교실에 모여 있다. 이래 저래 지쳐 집으로 돌아온 아이 손엔 스마트 하나 달랑 쥐어져 있다.
그런 아이 옆에 엄마라도 없다면 그 아이의 안전을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발가락 같은 부위라도 속절없이 골절되는 날엔 꼼짝없이
6주 어쩌면 8주 동안 씻기고 입히고 먹여야 하는 게 엄마다.
그러니까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건, 이런 의미인데...
아기 심장 소리 좀 들었다고, 원래 존재했던 건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모성애가 갑자기 폭발해,
출산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결정하는 드라마 주인공을 아직도 봐야 하다니...
너무들 한다 진짜. 이건 아니지!! 내가 전투적으로 드라마를 비판하자 남편이 이런다.
"그래도 회장님이 갑자기 기억상실증 걸리고 가정교사랑 결혼하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지 않냐? 그냥 봐..."
"그... 그런... 가?"
문득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되고 23년이 흘렀다. 육아라는 늪에 내 인생 전체가 빠져들고 있는 기분이다.
세 번째 골절 수발이 시작된 그날,
나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엉엉 울었다.
신이 나에게 '쓰기'보다 '육아'를 더 하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사실 좀 더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기도가 이젠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로
바뀌고 있었기에 이것이 내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인가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 할머니는 한복 바느질을 하는 분이었는데, 할머니가 바느질을 그만두고
재봉틀을 버리는 데 딱 십 년이 걸렸다. 내가 노트북을 버리는 데도 십 년쯤 걸릴까?
하지만 가끔 이상한 희망이 또 내 안에 차오르기도 한다. 나는 오락가락한다.
오늘은 대학생인 큰 애가 첫 교시부터 대면 수업이 있는 날이라 일찍 아침을 차려주고
식탁 위에 슬쩍 노트북을 갖다 놨다. 과제와 시험 준비로 바쁜 건 알지만,
그래도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기 전 딸에게 한번 정도 검열(?)을 받아야 마음이 편하다.
"엄마, 브런치 그만할까 봐. 엄마가 무슨 여성학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구질구질 한 글 뭐하러 쓰나 싶기도 하고... 또 이상한 소리 하구 이불 킥 할 거 같아."
낄낄 웃으며 내 글을 읽던 딸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엄마처럼 육아하면 여성학자는 되기 힘들 걸?"
"그렇긴 하지..."
"엄마 글이 엄청 중요해. 이 글이 여성학자의 참고문헌이 돼야 하거든.
사람들 잘 몰라. 아이 낳고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잖아..."
그러면서 '서발턴' 얘길 꺼낸다. 주류가 아닌 자들의 목소리!
특히 지금 이 진짜 목소리를 모아 제대로 된 역사를 기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자기가 지금 배우는 과목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는 거다.
"그래? 그럼 엄마 이런 글 계속 쓰는 거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럼!!"
딸이 의미가 있다니, 갑자기 지옥이었던 마음이 천국이 된다.
육아를 하길 잘한 건가? 또 내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우리들의 블루스]의 그 여주인공도 지금은 말도 안 되게 힘들겠지만
23년 후엔 나처럼 이런 천국의 맛을 보려나?
여성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해 옳다, 그르다 말을 못 하겠다.
가끔은 딸 키우길 잘했다 싶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육아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숨이 막힌다.
종종 눈물을 흘린다. 엄마밖에 안됐다는 자괴감이 나를 힘들게 한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낳아요? 말아요?"
"저도 몰라요. 서발턴의 목소리는 있는 그대로, 날것이라 의미가 있데요... 그냥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