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쓰는 육아일기: 세상 어디에도 없는 늦둥이의 맛
자고 있는데 갑자기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자기 방에서 혼자 자던 둘째 아이가 달려온 것이다.
이불이 열리자 풍덩! 아이가 우리 부부 사이에 누웠는데, 갑자기 마음이 행복해지며 웃음이 나온다.
이젠 성인이 된 큰 아이 키우면서도 종종 있었던 일이고, 그렇게 반가운 일도 분명 아니었는데.
나 왜 웃는 거지?
게다가 이제 개학하면 초등학교 5학년, 지난주 병원에서 신장을 체크했는데 드디어 150cm이다.
(체중은 비밀!) 작은 어른이라도 해도 믿을 체구인데 아직도 아기처럼 말랑말랑하고 작게 느껴지는 거다.
목 아래로 팔을 넣어 팔 베개를 해주니 꿈이 너무 무서웠다며 나를 꼬옥 안아주는데,
정말 이 아이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다는 생각이 파도치듯 밀려왔다.
퀸 사이즈의 침대가 꽉 찼고, 남편은 곧 매트리스에서 떨어질 듯 위태롭게 이불을 붙잡고 누워
어떻게든 출근 전 잠깐이라도 세컨드 슬립을 즐기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잠깐 뒤척였지만 다행히 우리는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휴대폰 알람이 울려 눈을 뜨니 날이 밝고 남편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나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나가 냉동실에 있는 핫도그 빵을 해동하고
프라이팬에 버터 한 조각을 던져 넣고 빵을 살짝 구웠다.
그리고 소시지에 칼집을 넣어 데치고 양파를 썰어 볶아 핫도그라 불릴만한 것을 만드니
샤워를 마친 남편이 나온다. 커피콩을 우르르 그라인더에 넣고 갈아 드립 커피를 준비하고,
둘이 식탁에 앉아 조용히 핫도그를 먹는데...
" 우리 쟤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어..."
" 그러게... "
" 이쁘지?"
" 응. 이쁘지. "
갑자기 아직 잠든 아이 얼굴이 보고 싶어 먹던 핫도그를 내려놓고 안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이불속에 콕 박혀 잠든 아이를 바라봤다. 그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기숙사에서 아직 자고 있을 큰 아이에게 보내주었다.
O병원에서 알람 톡이 도착했다. 깜박할 뻔했다. 지난주 검사받은 결과로 외래 진료가 있는 날이다.
이른둥이로 태어났지만 생각보다 잘 자라주고 있다. 하지만 검사받고 확인할 것들은 많아
의사를 만나는 일이 빈번하다. 다양한 진료과에서 여러 명의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데
오늘 만날 선생님이 제일 친절하다, 곁을 내어 주는 듯한 말도 건네는 분이다.
심지어 이름까지 재미있다. 그래서 그 선생님과의 외래진료가 있는 날 스트레스가 없는 편인데,
무슨 일이지? 평소와 다르게 냉랭한 분위기다.
일단 검사 결과가 못마땅한 거 같았다. 문제없어 보이는 결과지만,
이건 제대로 검사가 이루어진 게 아니라고 했다. 늘 건네던 다정한 인사도 없이
그냥 다시 검사를 하고 돌아가라고 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다시 검사를 받고 집으로 오는데 뭔가 기분이 울적해지면서
문득... 며칠 전 갔던 아웃렛 매장에서 본 부츠가 생각났다.
신발 뒤쪽에 수술 장식이 달린 어그 부츠인데, 큰 아이가 맘에 들어 사려고 했지만
사이즈가 없어서 못 샀다. 그런데 왠지 내 사이즈는 있을 거 같은 거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내 옆, 보조석에 앉은 아이는 벌써 졸 준비를 하며 파카 모자를 뒤집어쓴다.
늦은 오후, 점심 먹고 병원으로 출발한 우리는 퉁명스러운 진료를 받고, 귀찮은 검사를 한번 더 하고,
기분 좋을 일도 하나도 없다. 이러고 집에 들어가 봐야 나는 소파에 누워 잠깐 졸게 분명하고
아이는 탭을 붙들고 게임을 하거나 자신이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스톱모션 영상이나 볼 텐데
그보다는 운명적으로 떠오른 나의 부츠를 확인하러 가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엄마가... 집에 안 가고 전에 다 같이 갔던 아웃렛 가려고 하는데 어때?"
"... 그러지 뭐."
마트 가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 아이인데, 웬일로 흔쾌히 가주겠다고 하니 신기했다.
붕~ 달려 도착해 가보니 그 부츠 내 사이즈 7이 딱 있는 거다! 2월이라 최고의 할인율이다.
사실 몇 년째 신은 모카신은 양털이긴 해도 발등이 시려서 장시간 외출엔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중년이다. 무엇보다 발이 따뜻해야 한다.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한 아이템을 찾은 기분!
간만의 쇼핑으로 행복을 찾은 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내 옆에 아직 어두운 이 녀석을
어떻게 하나? 뭔가 적절하게 채워 줄 것이 없을까? 이곳저곳을 살피며 걷고 있는데
어느 지점에 도착하자, 아이가 발걸음을 딱 멈추고 나를 본다
"엄마, 나 저거... 사주면 안 돼?"
"!!!!!!! "
젤리다! 핑크부터 연두, 곰돌이부터 하트까지.
갖가지 색깔과 모양의 젤리가 담긴 투명 플라스틱 통이 둥근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젤리는 지난번에 온 가족이 다 같이 이 아웃렛을 방문했을 때에도
사달라고 했던 거다. 그때는 큰 아이도, 나도 결사반대를 하는 바람에 사지 못한 바로 그 젤리.
난 큰 아이를 키울 땐 그런 간식을 사주지 않았다. 대신 색소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설탕을 먹으면 아이들의 정서가 어떻게 불안해지는지 공포스럽게 아이에게 알려주었다.
마침 그 시절, 그런 류의 다큐멘터리가 유행을 했다.
하여간 설탕 먹으면 아이 주위 집중 못하고 산만해진다고 미디어에서 엄청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물론 지금 그 주장이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암튼 좀 그랬다.
언젠가 가까운 교회 집사님이 나에게 넌지시 전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준 사탕과 젤리를 우리 큰 아이가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것이다.
엄마가 이런 거 먹으면 큰일 난다고 했다면서... 이 공동체가 나를 버리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다.
"너, 저 젤리 사고 싶어서 여기 따라온다고 했구나"
"..."
"... 그래! 사자."
"진짜?"
최소 단위로 구매할 수 있는 양이 7900원. 이미 담겨 포장된 젤리도 있었지만
아이와 나는 우리의 젤리를 꼼꼼하게 골라 담았다.
"어떤 모양 젤리로 고를까?"
"난 귤 모양이랑 하트!"
"곰돌이랑 별도 넣을까?"
"응!!"
그렇게 젤리 한 통을 받아 들고 마침 주머니에 있던 현금만 원짜리가 있어 직원에게 건넸다.
잔돈을 받고 젤리 통이 담긴 작고 예쁜 쇼핑백을 직원에게 건네받는데,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이건 마치... 예비 새엄마라도 된 기분이랄까?
젤리 통이 담긴 쇼핑백을 손에 들고 행복한 표정이 된 아이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흘러나온다.
그리고 오랫동안 젤리와 사탕을 거부한 나의 굳건한 신념에 대해 생각한다.
젤리와 사탕을 쓰레기통에 버린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중년이 되니 내 인생을 뒤흔든 어떤 사건들의 결과가... 조금 보인다.
인생, 참 모를 일이다.
*사족: 앞으로 어떤 글을 쓸까 고민했는데...
조금 늦게 찾아온 막내와 미안함이 많은 큰 아이를 위해
육아일기를 다시 쓰기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