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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Feb 24. 2022

목라산

제주도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겨울 한라산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목라산

우리 카톡방 이름이다. 목요일에 한라산에 가는 모임을 줄여 표현한 건데, 나무 목(木)자가 연상돼서 한라산과 묘하게 어울린다.



팀에 (또) 퇴사하시는 동료분이 생겼다. 그분이 퇴사하기 전에 휴가를 쓰고 제주에 오신다고 한다. 나와도 같은 파트에서 일했던 적이 있고, 제주에서 나와 친하게 지내는 회사 동료와도 친해서 3명이 함께 만나기로 했다.

근데 가볍게 "겨울인데 같이 한라산이나 갈까요?" 했던 말이 급속히 추진력을 얻더니, 날아올랐다. 가볍게 던진 말인데 결코 가볍지 않은 산행을 하게 됐다. 알고 보면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인걸.



제주도에 오고 "한라산은 겨울이 가장 예쁘다"는 말을 꽤 많이 들었다. 제주 사람은 눈이 오고 난 다음 날 한라산에 몰린다고 한다.

왜? 산에 가면 눈밖에 안 보이잖아? 그냥 하얗기만 한데 그게 뭐 볼 게 있나?


나는 이전에 겨울에 한라산에 갔던 적이 이미 있다. 산 아래에는 눈이 없었는데, 산에 오르다 보니 눈 덮인 세상이었었다. 고등학교 친구가 군대 가기 전에 둘이서 제주 여행을 다녔는데, 군대에서 실컷 산 탈 텐데 일정 사이에 한라산을 끼워 넣었다. 아이젠도 없이 어떤 배짱으로 갔었는지 궁금하다.

그 당시를 떠올려 보면, 어떤 순간순간만 기억이 살짝 난다. 친구를 보며 '얘 은근 등산 잘하네' 하며 차마 쉬자고는 못 하겠고 헉헉대며 따라갔던 것, 그리고 한라산 정상에 오른 순간이다. 아, 생각난다, 정상에 올랐을 때, 나는 강렬하게 느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것은,

너무 춥다.
8년 전 한라산 사진. 얼마나 바람이 많이 불었으면 나무에 붙은 눈이 살벌하다. 너무 추웠다, 정말!


주변 경치고 뭐고, 너무 추워서 사진만 찍고 내려가자고 했던 추억. 한라산의 바람도 엄청나서 내 몸의 따뜻한 기운을, 조금의 미지근함도 남김없이 빼앗아갔다. 더 있다가는 정말 얼어붙어서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름다웠을 것이 틀림없을, 백록담 주변 풍경은 별로 기억도 안 난다. 내 생존목표는 하산이었으니까.


그 이후로 내 머릿속에 "겨울 한라산 = 히말라야"라는 등식이 생겼다. 어렸을 때 히말라야에서 추워서 기절한 적이 있는데, 그 정도는 맞댈 수 있는 K-추위다.


음... 근데... 겨울 한라산이 좋다고요...? 정말로?



지금은 '제주도 살면! 한라산 정도는 계절마다 가야지!'하는 근거 없는 당위성이, 점차 스르르 잊히는 8년 전 혹한의 생생함을 삼켜 버릴 만큼 커졌다. 그래서 한라산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겨울 한라산에 대한 의문은 가슴속에서 가시지 않았다.



제주 사람도 한라산을 못 간다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안 됐다. 한라산에 가려면 명절 기차표나 수강 신청 하듯 "예약"해야 했다. 당연히 인원 제한이 있고, 관음사와 성판악 모두 합쳐도 하루에 갈 수 있는 사람은 2천 명 정도였다. 그리고... 1월에 확인해보니 2월 일정까지 모두 예약 마감이었다.


뭐야, 이거? 평일이고 주말이고 다 마감이네??


'수강 신청 실패한 적도 없고 명절에 기차를 못 탄 적도 없으니, 2천 명 안에 들기는 어렵지 않겠지?' 생각했던 내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이래선 목라산 망한다!

알고 보니, 요새 한라산이 유행인가보다. <나혼자산다>에 전현무가 열심히 올라간 모습이 방송 한 번 탄 다음에 모두 마감됐다고 한다. 8시간 온종일 산 타고 싶은 관광객이 이렇게 많다고? 수요가 얼마나 많으면 중고거래에도 나온다고 한다. 야구장 앞에서 파는 암표 마냥, 돈 주고 산에 오르라고?


하지만 어째선지 팀 동료는 목요일 전에 한라산 3자리를 쉽게 구해왔다. 엥? 어떻게? 비법을 들어보니, 취소표가 나오는지 탐지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하! 그렇다, 생각해보니 우린 개발자였다! (물론 불법적인 요소는 없고, 주기적으로 새로고침하는 간단한 것이다. 디도스처럼 서버에 부하를 줄 만큼도 전혀 아니다.) 개발 능력을 이렇게 쓰다니, 창의력에 감탄한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예약일 직전이면 취소표가 많이 나온다. 경쟁이 치열하니 일단 예약해두고 안 팔리면 노쇼를 방지하려고 마지막에 취소하는 것 같다. 음... 예약시스템에 뭔가 대책이 필요할 것 같긴 하다.

(참고로 이런 부작용을 고치려고 한라산 예약시스템이 4월부터 바뀐다고 한다)

하여튼 우리의 목라산은 진정한 '목'라산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렇게 목라산은 순조롭게 마무리했습니다~

하는 해피엔딩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리 없다. 목라산은 우리를 여러 번 시험했다.


대설주의보

목요일에 휴가를 내두고 아이젠과 등산화, 등산복을 든든히 준비해둔 전날 저녁. 포털 맨 위에 속보가 떴다.

속보) 제주 산간지방 대설주의보


겨울 한라산인데 눈 내리면 좋은 거 아니야?

응~ 아니야~

눈 많이 오면 탐방로 입산 금지~


일단 등산로의 시작인 성판악까지 가기도 쉽지 않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차를 타고 성판악 휴게소까지 가겠지만(새벽 6시 전에 도착하면 휴게소 주차장에 주차 가능), 눈이 내리면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이것도 눈이 적당히 내려서 516도로는 대형차가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야기다. (제주교통통제현황)

어찌어찌 성판악 휴게소에 갔다고 하자, 그다음엔 한라산 등산로가 통제되지 않아야 한다. 최악의 경우, 진달래 휴게소까지는 갔는데, 정상 진입이 불가능할 경우다. 열심히 왔는데 눈앞에서 백록담을 뒤로 해야 한다. 얼마나 슬픈가, 널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한라산탐방안내)


새벽에 일어나야 했기에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혹여 새벽 4시 반에 일어난 보람이 없을까 봐 걱정하면서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바로 교통통제현황을 확인해보니, 소형차는 통제지만 대형차는 성판악까지 운행했다. 버스를 타면 된다.

일단 하나는 OK, 자 다음, 등산로는... '부분통제' 안 돼, 이럴 순 없어!

안타까움에 입이 툭 나온다. 한숨을 쉰다. 어쩔 수 없다, 일단 진달래대피소까지만이라도 가야지! 거기서 눈이 녹을 때까지 존버(매우 버틴다는 뜻)한다.


부분통제라니... 안돼...! 난 백록담을 보고 싶어!


목라산에 오른 사람은 꽤 많았다. 새벽 6시 정도였는데 버스는 만원. 성판악 휴게소도 등산하려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심지어 입산 QR코드를 찍기 위해 줄을 기다려서 한라산에 입장할 정도였다.

산에 가기가 쉽지 않네. 이렇게 비싸게 굴다니,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라산이지!


어찌어찌 등산로 출입구를 지나니, 불빛이 없어 어둑어둑했다.

새벽 동이 트기 전, 달빛에 비친 듯 희끄무레하게 옅은 풍경이 펼쳐졌다.

아... 그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한라산의 겨울 풍경. 동트기 전이라 아직 어두컴컴하다.


눈에 보이는, 색깔을 지닌 것에는 빠짐없이 흰색이 나란히 겹쳐있었다.

이건 마치... 비유하자면 포토샵에서 Ctrl + A로 개체를 전체선택한 후, 그림자 효과를 넣고 그림자 색을 흰색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두께 15px에 그림자 각도는 110도 정도로 맞췄을 때의 광경이다.

마냥 흰색인데, 채도 하나 없는 무채색의 흰색인데, 순전히 시각적으로 이런 아름다움을 내뿜을 수 있을까?

뭔가 잘못됐다, 내 눈이 뭔가에 홀린 것 같다.


눈이 펑펑 내리고 난 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덮이고 아무도 감히 눈을 쓸거나 밟지 않은 세상. 자연 그대로의 상태.

순수함이 극에 달하다 못해, '순수'로써 모든 걸 꾸며버린 모순적인 상황이다.

사진을 찍어도 렌즈는 흰색 가시광선 그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다. 듬성듬성 산개한, 어떤 거무튀튀한 색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사진은 순수의 아름다움을 다 날려버렸다.


눈을 밟는 게 죄짓는 게 아닐까? 그러기엔 뽀득뽀득 밟는 소리가 기분 좋다. 눈은 순수로 가득했지만, 귀는 순수를 망치는 짖궂은 어린아이의 장난으로 가득했다.


세상은 고요했고, 조심스레 평온을 깨뜨리는 등산객이 눈치 보며 세상을 느낀다.



이걸 보려고 한라산에 오는구나.

그런 거구나.


아니, 뭐가 예쁜지 말해줬어야지, 그냥 겨울 한라산이 예쁘다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진작 말해줬으면 내가...

하, 아녜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됐잖아요!




해가 뜨고 어수선한 어둠이 걷혔다.

여전히 세상은 희었고, 내 숨소리에 뿜어나오는 입김도 희었다.

간혹 새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소화기관의 귀여운 투정은 가까이서 들려온다.


아, 아침을 못 먹었구나.

진달래대피소에서 먹을 라면과 김밥의 환상 궁합을 떠올리며 몸을 한라산 중턱으로 끌어올린다.


등산은 라면과 김밥이다. 아직도 군침이 돈다.


김밥은 마치 냉장고에서 꺼낸 것 같았지만, 라면은 찬밥에 말아 먹어야 제맛이다.

지금까지 자연의 환상적인 광경을 느꼈다면, 지금부턴 문명의 환상적인 음식을 느낄 차례.

무겁게 등에 이고 온 질량을 배로 옮겨 담는다.




앞서 말했듯, 내 끔찍한 추억 속 겨울 한라산은 히말라야였다.

그럴 줄 알고 핫팩을 8개 터뜨렸다. 손에 2개, 발에 2개, 몸에 4개.


난 손발이 정말 매우 아주 차다. 겨울에 내 손을 잡아본 사람이면 '어? 뭐야?'하고 황급히 손을 떼겠지만, 내 손을 잡을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ㅠ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손이 차가운 건가?

아니다, 그냥 30여 년 동안 차가웠다.

아니아니, 30년 동안 손 안 잡힌 건 아닌데, 30년 동안 체질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여튼 겨울철 핫팩을 발에 붙이고 다녀야 겨울에 10분 이상 걸을 수 있다.


근데 또 땀은 빨리, 많이 나요. 그래서 겨울이라고 두껍게 입을 수가 없다. 겨울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다른 사람 손을 잡지 못하지만, 반대로 여름에는 땀이 나서 다른 사람 손을 잘 잡지 않는다. 다해...ㅇ... 아니, 여름에는 그냥 손발에 땀이 많다.


온도 변화에 민감하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한라산 정상이 가까워지면 난쟁이 나무가 많아지다 아예 없어진다. 바람을 막아줄 방어막이 없어지고, 흘렸던 땀이 순식간에 식어버린다. 땀 때문에 패딩은 안 입었으니 한낱 손바닥 반도 안 되는 핫팩으로 바람이 몰고 온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그렇다고 대자연의 추위가 막히진 않지만, 핫팩이라도 안 했으면... 아마 손발이 동상으로 잘려 나갔을 것이다.


너무 춥다.



한라산, 그 세 글자 때문에

30분을 기다렸다.

인증의 시대에서 한라산 정상석과 사진을 찍지 않으면 올라가지 않은 것이다. '나 대학 졸업했어요!' 해도 졸업장 인증 없으면 아무도 안 믿어준다. 그리고 사실 그 사진 없으면 인스타에 올릴 사진도 없다. ㅎㅎ


강한 바람에 발의 감각은 사라져갔지만, 정상석 옆에 서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고 돌렸다. 나는 30분 값어치를 하는 인증샷을 찍을 것이니까. 엄청난 사진을 남기리라!

드디어 대망의 내 차례가 왔다. 직장 동료한테 카메라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맡겼다.

심호흡 한 번 했다. 여기서 실패하면 쪽팔리기도 하고(사실 마스크 써서 쪽팔릴 건 없다) 무엇보다 아프다. 흡! 온 신경을 코어로!


다들 똑바로 서길래, 난 거꾸로 서봤다. 한라산 정상석과 함께.


건졌다.




백록담은 시원하게 펼쳐졌다. 백록담을 보러 가까이 가면 뻥 뚫린 시야도 시원하고, 나를 뚫어버릴 것 같은 바람도 시원하다. 너무 시원해서 추워죽겠다. 그래서 오래 못 봤다. 얼굴 많이 못 보여줘서 미안.


한라산의 하늘은 반은 구름, 반은 맑았다. 반쪽이라도 맑으니 좋았다. 미세먼지도 생각보다 없어서 성산일출봉이 희미하게 보였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제주가 너무 예뻐서 사진을 많이 찍고 싶었지만, 손을 꺼내는 순간 셔터를 누를 손가락이 남아나지 않았다. 더 찍으려 했다간 영원히 손가락이 핸드폰을 터치하지 못할 것 같았다. 눈으로 열심히 경치를 담아본다.


이 짜릿한 광경! 이걸 보려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올라왔구나!

고맙다, 한라산.


한라산에서 바라본 제주. 약간 뿌옇게 보이는 건 미세먼지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1시간 정도 내려오니 얼었던 발에 피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근데 그때부턴 발이 아프기 시작했다. 참을 순 있는데 상당히 거슬린다. 2시간 동안 언제 걸음을 멈출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오는 길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나무에 붙은 눈은 다 녹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너비였던 길폭이 두세 사람이 지나갈 너비로 넓어져 있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밟았다는 뜻이겠지, 그만큼 우리가 일찍 올라왔기 때문이겠지.


아침의 온통 새하얬던 광경은 꿈만 같았다. 정상에서 뻥 뚫렸던 경치도 이미 옛날 느낌이었다. 이렇게 느낌이 다르다고?

금방 내려올 것 같았던 하산길도 생각보다 길었는데, 250m 정도마다 박힌 말뚝의 번호가 얼른 1이 되길 바라면서 내려왔다. 올라올 땐 이렇게 많이 올라왔다는 걸 몰랐다. 분명 한라산에 홀렸기 때문이리라.


하, 끝났다.

목라산, 수고하셨습니다.




뒷이야기

하산하고 저녁은 근사한 걸 먹으리라, 다짐했다. 얼큰한 감자탕! 오, 너무 좋아요!

아니 근데 왜 감자탕집 문 닫았어요? 장사해 주세요, 제발...

이대로 운전하면 미쳐버려서 사고 낼 것 같다. 힘이 없다.

하지만 주변엔 감자탕집이 없는걸...


어쩔 수 없이 감자탕 말고 순두부찌개 먹기로 이 세상과 합의 봤다.

사람 한 명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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