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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Sep 16. 2022

가을은 아무 잘못 없다.

하늘이 맑아서 눈물이 났다. 가끔은 내 긴 머리카락을 날려 눈물을 가려주는 착한 바람이 고마웠다. 일 년의 사 분의 삼 지점에서 올해도 난 패배자가 된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지는 대로 살고 싶다고, 그게 진정한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꼭 이맘때가 되면 회안이 밀려왔다.  

         

“난 올해는 그나마 하나 했다. 운동하는 루틴을 만들었잖아. 매년 일월 일일마다 작심하고 못 지키는 세 가지가 다이어트, 영어 공부, 공인중개사 자격증 따기였는데 몇 년 만에 겨우 하나 이뤘다니까. 내가 다 기특할 판이야. 니들 기억해? 나 첫날 PT 가서 잘생긴 우리 샘 얼굴 계속 보겠다고 겁 없이 92만 원을 덜컥 결제했었잖아. 우리 남편한테 욕먹을까 봐 얼마나 열심히 나갔던지 그거 아니었음 올 해도 하는 거 없이 보냈을 걸.”  

        

혜연 언니는 그새 살이 더 빠져서 땀으로 젖은 운동복 상의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헐렁해 보였다. 언닌 더위가 가시지 않는지 커피잔에 들어있는 빨대를 뽑아 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깨물었다.   

        

“이젠 하루라도 운동을 안 하면 똥 싸고 안 닦고 나온 기분이라 안 나갈 수가 없어. 진짜 대단하지 않냐? 운동을 루틴으로 하는 인간들은 따로 정해져 있는 줄 알았거든. 크크 지은아 PT같이 하자니까. 아직도 생각이 없는 거야? 일주일에 삼일 만해도 정말 좋아. 건강도 챙기고 살도 빼고, 잘생긴 젊은 남자들도 실컷 보고. 크크 아니 뱃살이 나온다고 살이 처진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집에만 있으면 뭐하냐 시간 있을 때 하자니까.”      

    

“혜연아 넌 벌써 운동을 끝내고 온 거야? 이야 독하다 독해. 루틴이 될 때까지 얼마를 해야 하는 거냐. 나야말로 우리 막둥이를 낳았으니 올해는 정말 큰 일 한 거지. 안 그래? 막둥이라 그런가 힘은 드는데 이뻐 죽겠다. 심지어 똥 냄새도 이뻐요. 크크크 지은아 넌? 넌 요즘 뭐하고 지냈어? 내가 막둥이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 안부도 못 물어보고 사네.”          


미자 언닌 요즘 막둥이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작년 늦가을 즈음 언니의 임신 소식을 들었다. 출산한 지 이제 두 달 밖에 안돼서 오늘도 제발 언니네 집으로 와달라며 아기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더니 형부가 코로나로 재택근무하게 됐다고 아기가 잠든 사이에 부랴부랴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그런 언니의 어깨 위에 아기의 보드라운 볼이 기댔을 가제 수건을 미처 몰랐다는 듯 언니는 아무렇게나 끌어내렸다.


“언니 소율이 진짜 이쁘더라. 아기 눈동자가 새 까맣고 너무 커서 깜짝 놀랐잖아. 역시 언니 닮아 미인이야. 소율이 보면서 처음으로 둘째 생각했다니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쁜 건 이쁜 거고 내 능력 밖이더라고. 크크 조물주가 나에게 아이를 하나밖에 허락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흐흐 혜연 언니도 너무 좋아 보인다. 살도 빼고 운동도 하고 건강도 챙기니까 일석 삼조네. 언니 난 운동을 아무리 해도 재밌지가 않아. 운동 갔다 오면 아~ 잘했다 싶은데도 돌아오는 길에서 다음날 운동 나가야 하는 게 또 걱정이 돼. 웃기지. 그저 루틴이 됐다는 언니가 신기할 뿐이야. 난 올해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삶을 만들었어. 근데 아직 완성은 아니야.”          


“뭐? 아무것도 안 했음 안 한 거지 그것도 완성이 있는 거야?”      

    

미자 언니는 아기에게 젖 물릴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재차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응. 아직 완벽하지 않아. 아무것도 안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야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난 아직은 죄책감이 많이 느껴지거든.”  

        

“야~ 죄책감까지 느껴가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냥 뭐든 하는 삶을 살면 되는 거 아냐? 그리고 그거 한량이잖아? 그 정도 한량 짓을 하려면 죄책감 정도는 느껴줘야지 얘 좀 봐 날로 먹으려고 하네? 안 그러냐 혜연아?”    

      

“내가 너 미자한테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다. 크크크 우리 지은이 너무 이상적이야~ 그건 누구나 꿈꾸는 삶이잖아? 한량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봐봐 언니도 살이 빼고 싶은 이유가 그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언니만 만족스럽기 때문이야? 사람들이 이쁘다고 쳐다봐주고 부러워하니까 그런 이유는 없는 거야? 저마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혹은 되고 싶어서 노력해. 그로 인해 실망하고, 괴롭고, 고통받는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거야. 보여주는 삶. 어떤 위치에 있고 싶은 삶. 그런 거 말고. 우린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해져. 나만 도태되는 것 같고. 내가 쓸모없는 인간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잖아. 아니 어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것이 배제된 삶. 내가 그냥 나로서 괜찮은 삶. 나를 온전히 느껴보고 싶어.”           

“난 사실 지금 이대로도 너무 행복하거든. 적당히 집 안을 청소하고, 가족을 위해 건강한 끼니를 만들고, 하교 후 집에 온 아이의 간식을 챙기면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퇴근한 남편을 반기고, 가끔씩 와인잔을 기울이면서,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내가 좋아하는 뜨개를 하면서, 한 번씩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난 그런 삶이 너무 근사한 거 같아.”          


속의 말을 곱씹듯 뱉어 내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허울 좋은 말들 뒤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던가. 그런 삶이 지긋지긋해 질만큼 난 무엇을 했던가를 떠 올려 보려 했지만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나야말로 무엇이 되지 못해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더욱 강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아닐까.  

        

“아이고야 혜연아, 지은이 또 시작했다. 가을 타나 보다. 우리가 몇 번의 가을을 같이 지냈지? 어째 한 번을 안 거르고 매년 가을만 되면 센티해져서는 저 혼자 막 심각해. 이년아 너 기분 풀어준다고 작년 가을밤마다 미친년들처럼 헤헤거리며 술 마시고 쏘다니다가 막둥이 낳은 거잖아~~ 내가 말했지. 그날 밤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있었어 봐 우리 신랑이 콘돔 안 하는 걸 알고도 그냥 넘어갔겠냐고!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칠순은 돼야 막둥이가 스무 살이야!!”  


“크크크크 암요 우리 지은이 지분이 크지. 우리 진짜 작년 가을에 미친년들처럼 쏘다녔어. 연희동이다 삼청동이다 밤이면 밤마다 안 끌려 다닌 곳이 없었지. 크크 그래도 그때만큼 가을을 제대로 느껴 본 적도 없는 것 같아. 지난 십여 년을 아이들 키운다고 가을을 제대로 느낄 시간이나 있었어야지. 그 가을은 정말이지 내 것 같았어. 이태원 해방촌 루프탑에서 본 하늘은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아. 그게 다 지은이가 가을을 탄 덕분 아니겠어? 크크 지은아 소율이 기저귀 많이 사다 날라줘라. 미자 갱년기 올 나이에 산후 우울증 올라. 크크크.”          


나는 단풍이 드는 걸 보면 서글펐다. 사람이 흰머리가 나는 이유처럼 느껴졌다. 곧 낱 잎을 떼어 낼 것이고, 낙엽은 잠시 바람에 태워져 떠다니다가 누군가의 발끝에서 짓밟히고 결국 커다란 포대 자루에 아무렇게나 처박혀서 태워질 테니까. 우린 결국 실오라기 하나 없이 이곳에 왔을 때처럼 다만 육신만 남기고, 살면서 걸쳤던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 꼿꼿하게 서서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앙상한 나무가 걱정되었다.           


인생의 사분의 삼 지점에 들어서며 난 이제 막 가을이 되었다. 가을만큼 철이 들고, 가을만큼 고고하고 깊이 있게, 가을만큼 여유 있고 자애롭게, 너그러운. 내 나이에 맞는 나를 기대했지만 아직 철없는 여름을 떠나보내지 못한 나의 설익은 모습 때문인지. 이맘때가 되면 대책 없이 우울해지고, 쓸쓸하고, 누군가 곁에 있어도 외롭고, 마음이 싱숭생숭한 이유가...... 가을은 아무 잘못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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