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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콜라주 Jan 22. 2021

조선인이 쓰는 조선 이야기 (6)

IMF, 한국 조선산업의 역습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IMF 사태'는 많은 분들께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닷없이 터진 이 '국가 부도 사태'에 쩡했던 기업들 줄줄이 문을 닫고, 수많은 직장인 '명예롭게 퇴한다'라고 포장되어 자리를 었습니다. 당시, 글로벌 경영과 진취적인 직업관으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꿈과 포부를 키워주셨던 '베스트셀러 주인공' 회장님도 이 환란을 피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룹은 해체되었고, 이 과정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산하 조선소도 '워크아웃'이라고 하는 부도 직전의 상태로 국책 은행의 관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IMF 사태' 당일 일간지 기사 (출처: 중앙일보)

'환상적인' 90년대 중반의 대학 문화를 베짱이처럼 즐기고 있던 저와 동기들은 취업 시즌이 되어 갑자기 불어닥친 한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국가가 이런 상황인데도 조선소의 취업문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소의 인력 수급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조선소 얼마 지나지 않아 '워크아웃 조기졸업'을 선언하고 사명을 바꾼 뒤 엄청난 규모의 영 혁신, IT 인프라 투자를 진행합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IMF 때 대부분의 조선소들은 사실, '조용히 웃고 다'고 합니다. 나라 전체의 금융과 산업 휘청이며 난리가 난 상황에서 어떻게 조선 산업은 홀로 웃을 수 있었을까요? 먼저 조선 산업의 시장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조선 산업은 '전 세계가 하나의 단일 시장'입니다. 요새는 상품들이 국경을 초월하여 구매되고 소비되기 때문에 '세계가 단일 시장'이라는 말이 꼭 선박에만 국한된 말은 아닌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내수 시장에서와 달리, 해외 상품을 살 때는 관세 및 통관비, 운송비 등의 이른바 '무역 장벽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또한 해당 물품이 품질 및 안전 등 '로컬 룰'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규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 인터넷 상거래를 통해 문턱이 매우 낮아지기는 하였지만, '내수 시장'은 엄연히 해당 지역 수요-공급의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별도의 시장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상업용 선박은 목적 자체가 대양을 항해(Ocean-going)하여 국가 간의 무역을 하는 수단이 유롭게 국가 간 이동과 거래가 가능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소는 처음부터 그러한 '국제적' 운항과 거래에 필요한 모든 규정을 준수하여 선박을 만듭니다. 또한 설계 및 모든 건조과정에서 '이해관계 독립적 감리 기관'인 선급 협회 (Classification Society)의 감독을 받습니다. 그렇게 선박이 완성되면 선급에서 발급하는 인증서 등 각종 국제협약 증서 및 필요 서류들을 선주에게 제공합니다. 그래서 전 세계 어디서든 자유롭게 선박을 운행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합니다.


조선 산업에는 로컬 시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존재합니다. 이는 미국의 '존스 액트 (Jones Act)'나 중국의 '국수국조(國輸國造)'와 같은 폐쇄적 해운 운송 정책과, 국적 선사가 자국 조선소에 선박을 발주하는 '자국 발주' 케이스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제 단일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자국의 조선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지원책일 뿐 수출 시장과 독립된 내수 시장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거꾸로 한중일이 일부 선종에 대해 수출의 쿼터를 제한는 등의 '폐쇄적인 공급 정책'추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조선소를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를 '국가 안보적 위협'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비용이 얼마가 들든 자국 혹은 제3의 국가에 대안 조선를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메가톤급 기회의 이동'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중국은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인지 타 산업의 경우도 비용 문제가 있더라도 리스크 방지 차원에서 중국 외의 국가에 대체 생산기지나 대안 공급망을 하나 정도 추가 확보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저러한 이유들 때문에, 조선 시장은 내수, 수출 구분 없는 단일 시장에서 참여자 간의 무한경쟁을 통해 거래가 이루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이 추세에 큰 변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선박은 세계 단일시장에서 국제적 표준을 따라 거래됩니다. 때문에 선박 거래에서는 대부분 영문 계약서를 쓰며, 주로 '국제 기축 통화'인 달러화를 지불 조건으로 합니다. 심지어 분쟁이 생기영국 런던의 중재법원으로 갑니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한 해는 1996년 12월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조선산업은 이보다 6년이나 앞선 1990년 10월에 이미 OECD WP6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90년대 초반부터 한국 조선산업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국제 협력의 증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회원국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보다 산업이 OECD에 먼저 가입했다는 사실, 놀랍지 않습니까?


조선 시장과 거래의 특징을 알았으니 IMF 때 '조선 산업의 웃음'의 이유가 짐작이 되시지요?


선박은 주로 달러화로 거래되기 때문에, 조선소에는 당연히 선박 건조 대금으로 막대한 규모의 '달러' 금이 됩니다. 이렇게 입금된 달러는 외국산 자재를 사는데 일부 다시 지출이 되고 나머지는 원화로 바꾸어 직원들 임금과 국산 자재 구매대금을 지불합니다. 네, 당연히 이윤만큼 남은 달러도 있겠지요.

그럼 원화 대비 달러 환율이 오르면 어떻게 될까요? 달러로 받은 환율 상승만큼 올라가지만 원가 지출 항목에서 원화로 지불되는 금액은 환율이 상승해도 그대로이니 조선소의 이익이 대폭 증가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설명드리겠습니다.

환율이 달러당 900원 일 때 계약한   1억 달러, 원가는 약 90%인 9천만 달러이며 이 중 원화로 지불되는 비용이 약 40% (3천6백만 달러, 환율 달러 당 900원 적용 시 324억 원) 정도 된다고 해 봅시다. 이 배의 기대 이익은 10%인 1천만 달러, 90억 원이 됩니다. 그런데 율이 달러당 1800원으로 2배로 뛰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선가(매출)의 가치 2배인 1800억 원이 지만 원가는 9천만 달러 중 달러로 지불하는 60%의 비용올라 1296억 원(달러 지불 원가는 5천4백만 달러 x 1800원/달러 = 972억 원, 원화 지불 원가 324억 원은 고정)이 됩니다. 결국 이익이 애초 대비 5배가 넘는 504억 원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IMF는 외환 위기였습니다. 즉, 국가와 기업의 달러 보유고가 바닥이 나서 생긴 일입니다. 국민들이 금 모으기를 한 것도 금이 기축 통화인 달러처럼 원화 가치 폭락에도 버틴 거의 유일한 자산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조선소들은 그 귀한 달러 회사마다 수십억 불 씩 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영적으로도 천문학적인 환차익을 보고 있었으니 그 시절 조선 산업은 그 위상이 남달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IMF 때 한국 조선소들이 '남몰래 웃었던' 이유입니다.


IMF 이후, 한국 조선소들은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9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한 설비 확장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하고 기반 시스템 업그레이드와 인력 확충을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합니다. 일본의 패착과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200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조선-해운 퍼사이클'의 수혜를 고스란히 받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해 나갑니다. 저는 그 당시 한국 조선소들의 공격적인 투자가 현재까지도 중국의 도전을 막아내며 세계 1위의 시장 점유율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결정적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성공의 기억을 가지고 되풀이 한 '해양 플랜트 호황기'의 추가 설비 확장은 '과도한 설비', '구조조정의 대상'이라는 오명을 얻으며 아직까지도 각 조선소에 큰 부담이 되고 있지만 말입니다.


'조선소 설비 축소'는 한국 조선 산업의 구조조정을 논할 때 매번 언급되는 이슈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께서는 "설비 축소 정도론 안된다. 우리나라 Big3 중 한 조선소 정도는 없애야 공급 과잉이 해결되고 선가도 올라가서 나머지 조선소라도 생존시킬 수 있다."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저의 생각은 "글쎄요..."입니다. 경영학 개론 연습 문제처럼 명쾌하게 결론을 낼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동차나 항공 산업처럼 '탄탄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국가의 '전략적 용인'하에 루어지는 독과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것은 기업이 내수시장에서 체력과 경쟁력을 확보하여 수출 시장에서 경쟁국과 일합을 겨루는데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략은 조선 시장에서 적용하기는 어려운 일로 보입니다.

조선 산업은 앞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원래 '내수 시장의 개념이 없는' 산업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국가적 발주 지원도 경쟁국에 비해 너무 빈약한 실정입니다. 국은 건조 물량의 약 40~50%를 자국 해운, 에너지 회사에서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기 운송 계약을 해주는 중국 화주나 선박 리스 금융을 해주는 중국계 은행의 강력한 입김을 받는 '무늬만 외국 선주'로부터 받는 물량도 상당합니다. 일본도 주력 선종의 상당 물량을 수직 계열화되어 있는 자국의 해운사 및 종합상사를 통해 '자국 발주'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컨테이너선 등 국해운사의 자국 발주를 통해 단비를 일부 맛보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조선 산업의 수주 물량의 대부분은 외국 고객으로부터 나옵니다.

프랑스 CMA CGM이 중국의 리스금융을 받아 중국 국영조선소에서 건조한 23,000 TEU LNG 이중연료 컨테이너선 (출처 : seatrade-maritime.com)

해외 고객들은 매 입찰마다 전 세계 경쟁력 있는 조선소를 가능한 많이 초대합니다. 그 중 내부 기준으로 선정된 3~4개의 상위 조선소를 추려서(Short-listing) 서로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경쟁을 시켜 발주를 합니다. 만일 3개의 조선소를 Short-listing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에 경쟁력 있는 조선소가 3개 있으면 3개, 2개 있으면 2개가 들어가는 겁니다.

보통 이 부분에서 오해가 생깁니다, 입찰에서 '세 조선소가 경쟁하는 것보다 두 조선소가 경쟁을 하는 것이 유리한 거 아니냐'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선주는 조선소를 Short-listing 할 때 국적을 따지지 않습니다. 당연히 자리가 비면, 그 자리는 다른 나라 조선소의 차지가 됩니다. 동계 올림픽 숏트랙 결승전에 우리 선수가 많이 오르는 게 유리하겠습니까? 적게 오르는 게 유리하겠습니까? 그러니 한국 조선소를 하나 줄여 공급을 조정하자는 것이 정말로 우리나라의 이익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아니면 경쟁국에게 '결정적 기회의 이동'을 제공하게 되는 것인지는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대형 조선소의 구조 조정 문제는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또 다른 시리즈에서 심도 있게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공격적인 투자 조선 수퍼사이클을 통해 승승장구하던 한국 조선 산업의 어두운 이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금융 위기 및 세계 경기 침체로 조선 산업이 조정을 받는 과정에서 어떻게 중소 조선소들이 한꺼번에 몰락하게 되었는지 그 숨은 뒷 이야기입니다. 다음 에피소드를 통해 조선 산업이 국가적 정책과 금융 지원에 얼마나 의존도가 높은 산업인지, 그리고 '개별 기관의 나름대로는 합리적 정책 판단'이 한 산업에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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