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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콜라주 Jan 15. 2021

조선인이 쓰는 조선 이야기 (5)

일본, 한국, 중국 그 다음은 어디? - Part2

(전편에 이어)


조선소의 입지 조건 중 '천혜의 자연조건' 못지않게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후방산업의 성숙도'입니다. 달리 말해 '그 나라의 제조, 기반 산업의 발전 정도'입니다. 그 이유는 조선 산업이 '종합 조립 산업'의 특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주로 잘 짓는 선박은 대표적으로 대형 가스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초대형 원유 운반선 등인데, 보통 앞쪽에 '대형 아니면 초대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이 중 VLCC라 칭하는 '초대형 원유 운반선'의 경우, 길이는 300 미터를 훌쩍 넘고 폭과 높이는 대략 60m, 30m 정도 됩니다. 그럼 무게는 어느 정도 될까요? 선박은 '쇠(Steel)'로 만들어 지기 때문에 배의 자체 무게만 해도 4만 톤이 넘습니다. (중형 승용차가 보통 1.5톤에 길이가 5m쯤 되니 자동차 약 2만 7천대 정도의 무게와 같습니다. 자동차를 일렬로 붙여 세워 놓으면 130km가 좀 넘겠네요.)

현대중공업의 31만 8천 톤급 VLCC (출처: 한국조선해양)

한국의 대형 조선소에서는 이런 엄청난 중량의 배들을 1년에 수십 척씩 건조합니다. 이 배를 만드는 재료는 어디서 날까요? 조선소는 '조립 및 완성'이 주 임무이므로 심하게 말하면 '볼트 하나 너트 하나까지도' 다 밖에서 사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러니 결국 1년에 100만 톤이 넘는 재료들을 조선소로 이동시켜 와야 합니다. 이 물류비는 어떻게 계산될까요? 네 맞습니다. 보통 중량 혹은 개수 기준 운송비를 계산하여 재료비에 넣어서 지불을 합니다. 거리가 멀어지면요? 당연히 비용이 증가합니다.

배를 만드는데 가장 많이 쓰는 자재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로 '후판(두꺼운 판)'이라고 불리는 철판입니다. 완성된 선박의 전체 중량 기준 약 8~90%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조선소 입지 요소에서 중요한 하나는 바로 이 '제철소'가 가까운 곳에 있느냐가 아니냐가 될 수 있습니다. 거리가 늘어나면 운송비가 비싸지게 되고, 이 추가 비용이 조금만 차이 나더라도 재료비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질 수 있습니다.

현대제철 당진 제철소에서 생산되는 조선용 후판 (출처: 현대제철)

그냥 제철소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제철소가 '1급 제철소' 라야 경쟁력이 있습니다. 1급 제철소는 국제 선박 성능 품질 관련 독립 감리 기관인 '선급(Classification Society)'의 인증을 받은 수백 가지 종류의 철판을 조선소의 주문에 따라 맞춤 생산,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항상 원가 압박에 시달리는 조선소에 톤당 단 1달러라도 싸게 공급해야 경쟁력이 있는 제철소입니다. 그래서 원재료인 철광석과 무연탄으로부터 철판을 직접 생산하는 '일관화 프로세스'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에는 이러한 1급 제철소가 2개나 있습니다. 경쟁국인 중국과 일본도 이러한 1급 제철소들이 뒤에 든든히 버티고 있습니다.

중국도 지금은 가장 경쟁력이 있는 제철소 여럿을 보유하고 있지만, 초기엔 선주들이 "중국산 철판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발주하겠다'라고 하는 등 수모를 겪었습니다. 엄청난 물량 처리 경험 및 국가적 지원이 없이는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시장이 바로 이 '선박용 후판' 시장인 것입니다.

주요 국제 선급의 로고, 우리나라의 KR 포함 주요 해운국, 조선국에서 운영하고 있다. (출처: oceansplasticleanup.com)

이제 이번 편의 메인 주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중일 다음 조선산업의 패권은 어떤 나라가 가져갈 것인가? 후발 주자가 한중일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조건은 너무도 당연하게 자국 영토 내에 '바다'가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리다시피 그냥 바다가 아니라 천혜의 조건들이 구비된 그런 '양질의 바다'여야 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인력의 공급 조건과 인건비적인 강점입니다. 우선 제조업에 유입될 수 있는 일정 규모 이상의 인구가 있어 한 조선소 당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현장 직공들의 수급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구소부터 생산 현장까지 수십수백 가지 직군의 전문 인력들이 교육받고 훈련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해야 합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 인력들이 바라는 임금 수준이 적어도 중국보다는 더 낮아야 합니다.

세 번째 조건은 이번 편에서 강조드렸던, 후방 산업의 지원 환경입니다. 특히 경쟁력 있는 제철소가 필수입니다.

이 세 가지 필수 조건을 가지고 조사를 해보니 인도, 러시아, 중동의 이란이 '강력한 후보'로 보입니다. (브라질도 있었지만 산업 평균 임금이 이미 중국을 추월하고 있어 후보에서 제외하였습니다.)


이제 '신의 영역'으로 가보겠습니다. 조선 산업의 경쟁력을 위한 '신의 축복 3종 세트'인 기온, 강수량, 바람 조건을 따져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신의 선물'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 어려운 일인 거 같습니다. '세계 기후 분포도' 기준으로 보면 한중일 조선소 위치한 지역과 비슷한 기후대에 바다를 가진 나라가 생각보다 얼마나 적은지를 깨달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북반구는 한중일 포함, 미국, 중동 일부 및 서유럽 국가 들이 있습니다. 남반구는 남미의 브라질, 우루과이, 오세아니아의 뉴질랜드 북부, 시드니와 캔버라가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 일부, 그리고 아프리카의 남쪽 끝단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을 시작하기엔 산업인구의 한계가 있거나 이미 너무 '선진국'입니다.

세계 기후 분포도 (출처: mapsofworld.com)

앞서 언급한 조선 산업의 '강력한 대안 후보'들의 조건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인도는 신의 선물을 못 받은 것 같습니다. 기후가 사시사철 너무 덥고 습합니다. 바다에 면한 인도의 최북단이 중국의 최남단의 위도와 비슷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러시아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춥고 바람이 많이 붑니다. 러시아의 최남단 항구가 바로 북한의 최북단과 맞닿아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란은 사막기후인 남쪽 해안가와 달리 수도인 테헤란이 있는 북쪽의 해안은 기후가 한국과 비슷하여 조선을 하기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산업에 종사할 인구도 많으며 아직 임금 수준도 중국보다 낮아 조선 경쟁력을 갖출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란의 북쪽 바다인 '카스피 해'는 닫힌 바다, 즉 다른 바다로 오고 갈 수 없는 'Closed Sea'입니다. 오~ 신이시여!

(엄밀하게 얘기하면 다른 바다로 통하는 러시아 운하가 있긴 하지만 최대 통과 가능 폭이 16.8m에 불가하여 일반적인 상선 수출은 불가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기대하셨던(?) 동남아의 신흥국들도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의 발전 이후 제조업의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는 동남아의 신흥국들은 위의 첫 번째 조건인 '양질의 바다'와 두 번째 조건인 '풍부한 인력과 인건비적 강점'에서 주목받는 국가들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조건이 '아직은' 매우 열악합니다. 특히 세 번째 조건인 제조업 후방산업 기반이 너무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현재로서는 1급 제철소는커녕 배를 만들기 필요한 수천 가지의 기본 부품들도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들이 조선업을 시작한다면 대부분의 부품을 당분간 경쟁국인 한중일에서 비싼 운송비와 로열티를 줘가며 공급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기후조건이 조선 산업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들도 ‘신의 선물’을 받긴 받았으나, 그 것이 조선업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태국의 휴양지 전경 (출처: Six Senses Yao Noi Resort)

조선 후발국들에게 중국의 존재는 정말 좌절스러울 정도로 높은 '진입 장벽'이 될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많은 신흥국들이 조선 산업에 욕심은 나지만 아직 용기를 못 내는 이유도 저는 단연코 '중국의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과 일본의 장벽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두 나라는 내수 시장의 한계로 수출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천연자원도 부족하고 관광 인프라도 상대적으로 약해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 수출 제조업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런 '절박한 조건'이 어떤 나라의 제조업이 발전하는데 필요한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제조업으로 먹고살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혁신과 기술개발이 이루어지고 결국 제조 강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저는 오히려 자원 부국이자 엄청난 내수 시장을 가진 중국이 한국, 일본보다 먼저 조선 산업을 떠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해군력 유지와 자국내 필수 운송 물량을 소화하는 수준으로 축소되던지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신흥국들에게 조선 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는 있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세계 기후의 변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한중일 각 국의 조선 산업 정책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이에 따른 '기회의 이동'이 어떻게 발생할 지도 궁금합니다. 또한 각 국가의 인구의 변화 특히 제조업 관련 인력 증감 현황, 또한 국민 평균 임금 수준의 변화도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볼 예정입니다. 독자분들도 오늘 저와 함께 살펴보신 내용을 바탕으로 과연 어떤 나라가 한중일의 다음으로 차세대 조선업을 이끌게 될 것인지를 예측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끝내기 전에 오늘의 주제와 연계하여 몇 가지 생각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조선 산업을 위한 '신의 선물'은 누군가 열심히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조선은 엄청난 자본과 고정 시설을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해야 하는 산업입니다. 그러니 특별한 기회 이동의 요소가 나오기 전에는 후발 주자가 생기기도 어렵고 기존 투자를 한 국가도 산업을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 적합한 기반을 이미 갖춘 나라가 약점인 '제조 인력의 감소'와 '인건비의 상승' 등의 문제에 대한 창의적 해결책을 고안해 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부자 나라이지만 인구가 절대적으로 적어 신흥국 국민들을 노동인력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중동의 산유국들이나 싱가포르의 예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도 특정 산업에 한하여 제한된 인원 수의 외국인 노동자의 취업과 국제 시장가 기준의 임금 체계를 허용한다면 어떨까요? 아니면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경제협력 및 북한의 제조인력 육성 지원 차원에서 인력 교류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요?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리즈 어딘가 에서는 이러한 정책적인 분야도 한번 다뤄볼까 싶습니다. 혹시 압니까? 독자 중에 고위 공직자가 계셔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될지? 모를 일이죠. ^^     


다음 편에서는 한국 조선소의 중흥을 이끈 IMF, 그 거짓말 같은 역사의 현장을 저와 함께 살펴보시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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