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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콜라주 Jan 15. 2021

조선인이 쓰는 조선 이야기 (4)

일본, 한국, 중국 그 다음은 어디? - Part1

조선소에서 가끔 높은 곳에 서서 야드(배를 짓는 현장) 너머 경관을 바라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말 리조트를 지어도 좋을 거 같은 풍경이네...'


그렇습니다. 조선소는 대체로 풍광이 정말 아름다운 곳에 있습니다. 대부분 자연 방파제가 잘 조성되어 있는 바닷가 만(Bay)에 위치해있고 앞에는 멀찍이 섬 한 두 개 정도가 아련히 보입니다. 파도는 사계절 잔잔하여 햇빛에 반짝이는 거울과 같은 앞바다는 호수를 보는 듯합니다. 날씨도 온화하여 서울에서 한파 소식이 들려도 대부분 영상의 날씨, 여름에는 좀 덥긴 하지만 도시처럼 짜증스럽지는 않은 편입니다.

거제도의 양대 조선소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전경 (출처,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왠 갑자기 경치, 날씨 타령이냐고요? 오늘의 주제와 매우 밀접한 내용이라 그렇습니다.


저는 직업상 정기적으로 경쟁사, 경쟁국 동향을 파악해 보아야 합니다. 너무나도 치열한 국내 경쟁도 괴롭지만, '아직은 멀었겠거니' 안심하고 있다가 불쑥 눈 앞에 다가와 있는 경쟁국 조선소의 소식에는 더욱 공포감을 느낍니다. '이번에 OOO 컨테이너선 입찰에서 결국 중국이 몇 척을 가져갔다네...', '이번 XXX 해양 프로젝트를 싱가포르가 가져갈 줄은 몰랐구먼...' 가끔 있는 일이고 전체 볼륨으로 보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경영진은 바싹 긴장하게 마련이고, 경쟁국 조선소의 전체적인 상황 파악은 필수가 됩니다.


언젠가도 그렇게 경쟁국 조선소들의 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저는 갑자기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도대체 그 조선소들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와, 너무했네 진짜...'

그래서 급한 대로 일단 중국의 주요 상위 조선소 50개, 일본의 주요 조선소 30개를 추려서 소재지를 조사하고 비즈니스 인텔리전스 툴을 이용하여 세계 지도 위에 건조량 기준으로 물방울 그래프를 그려보았습니다. 결과는 너무도 흥미로웠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다고?"

[좌] 중국 Top Ranking 조선소 분포(중앙 아래가 상해 클러스터), [우] 일본 Top Ranking 조선소 분포 (우측이 세토 내해 클러스터)

중국의 주요 조선소들은 장강(양쯔강) 삼각주에 위치한 상해(Shanghai)를 중심으로 한 반경 200km 안에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중국 조선 산업은 전통적으로 북쪽 대련(Dalian), 그리고 남쪽 상해 이렇게 양분되어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최근에는 북쪽 대련은 방위산업 위주로 발전해가고 일반 상업 선박은 남쪽의 상해 근처로 경쟁력이 편중되는 것 같습니다.

일본도 혼슈, 시코쿠, 규슈 3개의 섬에 둘러싸여 마치 호수와 같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는 '세토 내해(Seto Inland Sea)' 조선해양 클러스터가 계속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상해 클러스터와 일본의 세토 내해 클러스터를 직선으로 연결 후 이를 지름으로 한 원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러자, 중심이 '제주도 서귀포' 근처 반경 600km의 원이 그려집니다. 이 원안에는 한국의 울산, 부산, 경남, 전남 지역의 조선소와 중국 상해 및 저장성(Zhejiang) 및 강소성(Jiangsu)의 대표 조선소, 그리고 일본의 주요 조선소가 거의 모두 포함이 됩니다.  전 세계의 8~90% 이상의 선박 건조를 책임지는 조선소들이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반경 600km의 원안에 대부분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중국의 대표하는 상해 외고교 조선소(SWS)와 일본을 대표하는 이마바리 조선소(Imabari) 간 거리

이후 저는 각국 및 세계 통계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모은 통계는 각 지역의 월별 기온과 강수량에 대한 자료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비교적 가까운 거리 안에 있는 한중일 주요 조선 도시의 기온, 강수량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상해가 부산보다는 연평균 기온이 더 높고, 세토 내해 쪽이 부산보다 강수량이 좀 많다 이런 정도였습니다.


한국의 일부 조선소에서는 아직도 해마다 자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있습니다. 마치 어부들이 풍어제를 하듯이 말이지요. AI가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21세기의 조선소에서 왜 이런 고리타분한 일들을 하고 있는 걸까요?

조선업은 기후의 뒷받침이 없이는 경쟁력을 갖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를 건조하는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자연과 맞닥뜨려야 하는 외업(Outdoor) 공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전체 공장에 지붕을 씌워 옥내화를 하지 않냐고요?

한국 대형 조선소들이 주로 짓는 선종은 길이가 300m를 훌쩍 넘는 선박들입니다 폭과 높이까지 따지자면 정말 엄청난 크기의 철 구조물 (Steel Structure)입니다. 국내 최고층 롯데월드 타워가 555미터이고 2위인 부산 엘시티 더샵이 411m, 3위인 여의도 파크원 타워가 338m 정도가 된다고 하니 배를 수직으로 세운다면 한국에서 3위나 4위권 건물이 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63 빌딩은 249m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큰 건축물을 옥내(Indoor) 작업장에서 짓기는 불가능합니다. 시설 건축비와 유지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게 되니깐요. 결국 작은 블록들을 모으고 모아 점점 커지다 보면 배의 최종 건조 단계에서는 옥외 공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옥외 공정은 당연히 기온, 강수량, 바람의 영향을 받습니다. 조선의 주요 작업은 용접과 도장인데, 용접은 온도가 너무 높으면 작업효율이 안 나고, 온도가 너무 낮으면 품질 불량이 납니다. 또한 비가 온다면 품질 및 사고 위험 때문에 작업이 불가능해집니다. 또한 도장 작업은 말 그대로 페인트 칠인데, 전처리와 수 차례의 반복(덧칠) 도장 공정마다 품질관리를 위해 습도를 철저하게 통제해야 합니다. 그나마 블록의 도장은 환경문제 때문에 주로 엄격하게 관리되는 옥내 작업장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습도가 높으면 품질 불량이 나기 때문에 날씨가 궂은날이면 마치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듯 제습기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습도를 낮춰 작업을 해야 합니다. 온도가 낮은 날에도 페인트 작업이 안되는데 그때는 전기 히터를 틀어놓고 온도를 올려 작업을 해야 합니다. 제습기와 히터는 '전기 먹는 하마'입니다. 작업 효율이 떨어지고 비용이 크게 증가합니다. 게다가 탑재나 의장 후 마무리 도장과 같이 옥외에서 꼭 해야 하는 페인팅 작업은 습도가 높거나 비가 오면 작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좌) 대우조선해양 탑재 수평 대용착 자동용접 작업, (우) 삼성중공업 옥외 페인팅을 작업을 위한 전처리 작업 (진공 블라스팅 로봇) (출처 :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옥외 작업은 바람의 영향도 큽니다. 캠핑할 때 바람이 센 야외에서는 버너 불꽃이 흔들려 라면이 잘 안 끓듯이,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의 용접 작업은 품질 불량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한 옥외 도장 스프레이 작업을 할 때 바람이 세면, 페인트를 날려 품질 불량, 원가 낭비 문제뿐 아니라 환경오염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람이 너무 세게 불면 크레인을 못써 탑재 작업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수백수천 톤 되는 블록을 옮기는데 바람이 불어 그 무거운 블록이 그네처럼 출렁거린다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해집니다. 만일 바람 때문에 크레인을 못써 Critical Path에 걸린 블록을 제때에 탑재하지 못한다면, 도크 안의 전 공정이 영향을 받습니다. 하루에 수십, 수백억의 매출 손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옥외(Outdoor) 공정이 필수인 조선 산업은 어쩔 수 없이 온도, 강수량(습도),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고, 자연조건에 따라 경쟁력은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서 중국의 양대 조선소가 북쪽의 대련, 남쪽의 상해 두 군데서 발전하다가 상해 쪽으로 중심추가 기우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기후 조건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련은 수도 북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발해만을 지키는 중국의 군사,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해군력을 키우기 위한 조선소가 오래전부터 발달되어 있었고 그 안에 숙련된 엔지니어들을 많이 양성해 놓았습니다. 엔지니어들의 역량이 훌륭하니 군함뿐 아니라 일반 선박도 매우 훌륭하게 건조할 수 있었고, 그렇게 명실상부한 중국의 2대 조선소 중 하나로 이름을 알려왔습니다. 그런데 대련은 겨울에 바다가 얼 정도로 혹한의 추위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선박을 건조하다 보면, 툭하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날씨와 폭설 등으로 선박을 건조하는데 많은 애로사항이 생기게 됩니다. 시절이 좋을 때는 큰 문제가 안되었겠지만, 시황이 어려운 지금 같은 때에는 일 년 내내 높은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조선소와 경쟁을 하기에는 매우 버거운 '핸디캡'이 되는 것 같습니다.  

대련 앞바다가 얼어 고립된 수백 척의 어선 (출처 : Ecns.cn)

온도, 습도, 바람 외에도 조선업을 하기 위해 자연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를 건조하기에 적합한 안벽(Quay) 수심과 자연 방파제의 존재입니다.


조선소에서 배가 건조될 때 앞서 설명한 대로 '탑재(Erection)'라는 과정을 거쳐 레고 블록 쌓듯 각각의 블록을 순서대로 용접하여 배의 형상으로 만들고, '물에 들어간다'라는 의미인 '진수(Launching)' 과정을 통해 배를 바다에 띄워놓고 최종 작업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 후 '해상 시운전(Sea Trial)' 등의 테스트를 거쳐 고객에게 배를 인도합니다. 배는 당연히 물 위를 다니는 운송수단이기 때문에 육상에서의 테스트에 한계가 있고, 물 위에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제대로 해봐야 합니다. 이 과정을 '안벽(Quay)'이라고 하는 일종의 '배를 묶어 놓는 부두'에서 진행합니다. (조선소의 공정이 익숙하지 않으신 독자들은 매우 쉽게 잘 정리된 삼성중공업의 블로그 소개 글을 참고하세요 : https://blog.samsungshi.com/391 )

선박을 완성하기 전의 배는 신생아와 같습니다. 아기는 사람의 모습은 갖추고 있지만 작은 외부의 충격이나 병균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침대에 펜스도 설치하고 부드러운 쿠션들을 놓아 밤낮으로 조심스레 살피는 것처럼, 진수한 선박도 가장 안전한 장소에 계류하여 정상적인 기능을 할 때까지 잘 보호를 해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안벽과 방파제입니다. 특히 방파제는 일상적인 파도뿐 아니라, 가끔씩 오는 너울(스웰)도 막아야 하고, 여름~초가을에는 태풍도 막아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잘 조성된 방파제와 방파제 안쪽 안벽에 계류, 건조되고 있는 각종 선박 및 해양플랜트 (출처: 대우조선해양)

제가 예전에 근무하던 조선소는 신생 조선소답게 배를 건조하며 필요한 인프라 시설을 동시에 갖추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 중 마지막까지 골치를 썩인 시설이 바로 '안벽(Quay) 방파제'였습니다. 완성 단계에서 너울이 와서 테트라 포드 절반이 유실, 다시 만들어 넣었는데 이번에는 태풍이 와서 케이슨(방파제 기초)까지 유실... 2~3번의 시행 착오와 엄청난 자금 투입 끝에 겨우 완성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매년마다 유실된 테트라포드를 수백 개씩 계속 새로 만들어 넣어줘야 하는 작업은 계속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그 조선소 앞이 '망망대해'였고 자연 방파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가까운 앞 쪽에 섬이 하나라도 있고 조선소가 깊은 Bay 안쪽에 있었으면 웬만한 너울과 파도는 부서져 안벽 방파제까지 오는 파도의 크기가 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박의 건조과정에서의 리스크가 없어질 뿐 아니라 방파제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과 비용이 현격히 줄어들어 경쟁력에 큰 도움이 됩니다.


제가 서두에 '멀리 섬이 한두 개씩 보인다, 마치 호수 같다'라고 하였지요? 그냥 경치 자랑을 하고자 한 말이 아닙니다. 온도, 비, 바람뿐 아니라 자연 방파제와 안벽 수심 등 '조선에 적합한 자연조건'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것이 조선소의 경쟁력을 좌지우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조선 산업은 정말 '신의 축복'이 없이는 불가능한 산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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