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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Apr 24. 2024

꺼져가는 불빛

5회 말 무사 이루, 7번 OOO선수 적시타 안타, 1루 찍고 2루, 2루 선수는 3루를 돌아서 홈인, 한 점 추가했습니다. 귀에 웽웽거리는 야구 중계 해설이 소음공해를 유발한다. 마음은 비웠는데 거슬리는 건 사실이다.

2인실 옆 베드 환자의 TV 리모컨 독점으로 인해 참고는 있는데 꺼달라고 하기에는 무리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배려심 없는 무대뽀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무슨 안 좋은 소리 듣게 될 게 불 보듯 뻔하다. 커튼 한 장 사이로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한참 뒤 링거 걸어둔 폴대 끄는 소리를 내며 쓱 나가버리는 옆 베드 환자. 이 때다 싶어 리모컨을 가져와서 TV를 꺼버렸다. 아무 소리 안 나는 조용함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버지 표정도 한결 편안해 보인다.

잠시 후 돌아와서는 리모컨을 또 찾는다. 돌려주면서 아버지가 주무시니 볼륨 좀 낮춰달라고 부탁했다.


시간은 흘러 시계를 보니 여섯 시 반, 저녁 식사하면서 노래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열린음악회'를 틀어드리고 싶었다. 옆 베드 환자는 은발에 파마머리 육십 대 중후반 남자, 딱 봐도 성깔 있게 생겼다.

"아버지가 노래 좋아하셔서 채널 좀 돌리고 싶은데요, 리모컨 좀 주세요."

그러자 예감한 대로 날벼락같은 언성을 내지른다.

"그 아지매들 말이야, 얼마나 시끄러운데 냉장고도 다 차지하고 말이야, 난 옆에 화장실도 못 갔어. 그럴 거면 1인실 가든가 하지 말이야.."

기가 차서 할 말이 쉽사리 나오질 않는다. 갑자기 오물을 뒤집어쓴 느낌이랄까.

"난 오늘 왔거든요. 그래서 바라는 게 뭐예요? 리모컨 주세요."

"가져가요, 가져가."


눈을 뜬 아버지가 근심스럽게 바라본다.

일부러 태연한 척 채널을 돌렸다. 

'You Raise Me Up'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들리지도 않고 감흥조차 일지 않았다.

"고난이 찾아와 내 마음을 짓누를 때 날 일으켜 산 위에 우뚝 세우고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언니, 동생에 이어서 간병을 왔는데 수시로 영상통화를 하고 청력이 약해진 아버지께 조금 톤을 높여 의사소통을 하니까 간간이 시끄럽긴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종일 야구중계방송을 틀면서 본인의 취미활동을 옆 고령환자 안중에도 없이 시끄러운 소음을 유발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은 없이 저렇게 대놓고 무식하게 언성을 높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종류의 인간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잠시 후 병실 나갔다가 돌아오니 그새 그 인간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야구를 보고 있었다.


일교차 낙폭만큼 천장에선 열기가 가동되기 시작하고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병원의 무거운 공기가 체세포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수시로 아래로 처지는 몸을 위로 올려달라고 손짓하고, 하루 두 번 네불라이저, 기저귀 케어, 소변량 체크, 물 드리기, 식사 수발, 약 드리기, 세안과 마사지, 주사를 뺀 틈을 타서 휠체어 이동, 1층 로비 스타벅스에서 디카페인 음료를 드렸더니 달달해서 빨대로 잘 드셨다.


여기 병원은 환자들이 유일하게 바깥공기를 쐬는 산책길 조성이 미흡하다. 병원 주위로 제철 철쭉이 알록달록 피어나서 생기로운데 가까이 다가갈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야외 주차장 사이로 휠체어를 밀어서 소나무 아래 벤치가 있는 곳까지 다가가자 낙동강 천변이 시야에 들어와서 물 만난 고기처럼 시원해진다. 병원 생활이 2주 차로 접어들면서 아버지는 집에 가고 싶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병원 밥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밥숟갈을 내밀면 고개를 젓는다. 채소에 초장을 찍어서 먹고 싶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어떤 음식이 입에 맞을까 궁리 끝에 막국수가 떠올랐다. 막국수를 시켜드리자 입에 맞으신 듯 1/4 맛있게 드신다. 


안동대교 아래 흐르는 낙동강 밤바람은 답답한 가슴을 훑으면서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산책로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는 나는 간병하는 데 메인 몸이다.

강 건너편 가로등 불빛이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내 마음을 그리듯 막대그래프를 검은 강물 위로 흔들리며 띄운다. 고흐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데 낭만도 감상도 별빛도 흩어져버렸다. 

빛이란 무엇인가. 멀리서 가물거리는 빛은 온기인가, 냉기인가, 희망인가, 꺼져가는 한숨인가. 

밤하늘 별빛은 생명이 다하는 그날 천상으로 인도하는 초롱불인가.


아버지가 퇴원하는 날에는 안동댐 근처 월영교를 건너고 간고등어구이 한식을 사드려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체력이 남아날지 모르겠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연둣빛 신록이 산등성이 너머로 몽글몽글 피어나고 연보라색 라일락 오동나무 꽃이 닫힌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데 그 신록마저 누군가의 생기를 빼앗고 짙어지는 그림자 같아서 두렵다. 이제 남아있는 날들은 가파른 내리막길, 가속도 붙은 휠체어 바퀴를 붙잡지 못한 채 멍하니 보내드려야만 되는 한 송이 불꽃을 어찌하면 좋은가.






안동대교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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