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그늘에 숨어서 파란 귀를 쫑긋 세운 달개비의 파란(波瀾)을 좋아한다.
진분홍 찬란한 배롱나무 꽃잎 보란 듯이 떨어지는 풀숲 옹색한 살림살이 옹송그리며 서러운 매무새 마디를 짚고 언제나 반듯이 고쳐 앉는다.
파란 많은 소란에 녹슨 자물쇠를 철컥 채운 고요함이 깃들어 있다.
키가 작은 달개비는 잔물결, 키가 큰 달개비는 큰 물결을 일으키며 여름 한 철 살아가는 풀꽃들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다.
습기를 먹고 자라는 벽면 곰팡이를 닦아내며 바람이 흔들고 가는 조가비 풍경 소리 처서를 지나는 저녁 구름 설레발 물들이고 내 지친 여름살이도 갈대발을 거두어들인다.
닭의장풀 같은 파란색 뜨개 가방을 메고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맨발로 걸었다.
정갈하게 비질 된 자국이 선명한 길은 빗살무늬 토기같이 견고하고 단단하다.
수많은 발자국이 밟고 지나가도 길이 간직한 그 무늿결 다 지우지 못한다.
시간의 물결이 얼룩진 그 길을 걷고 있으면 인파에 휩쓸린 나는 사라지고 어디에서 왔는지 흔적을 묻지 않는다. 짙은 그늘에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에 포착된 희미한 빛을 마저 여과시킨 사람들이 슬쩍 흘리고 간 분실물을 길은 또다시 비질한다.
경쟁이 부추긴 피로 누적 분실물을 찾으러 오는 이 없는 깊은 산속 유실물센터에는 오색딱따구리들이 그들의 사물함을 여는 소리가 분주하다. 길가에 벗어둔 신발을 찾아들고 발을 씻는 개울물에 서서 대충 씻는데 편히 앉아서 씻으라며 자리를 양보하는 분이 계셨다. 먼저 말 걸어주시고 남의 불편을 내 일같이 알아보는 그분의 온기, 발바닥 지문이 닳도록 걷고 나면 저절로 생기는 걸까.
그 길에서 쓰러진 고목들을 여럿 만났다.
천 년 만 년 살 것 같지만 하늘이 허락하는 일정높이에 도달하면 어느 천둥벼락 치는 밤 쓰러지고 만다. 무참히 쓰러져 꺾인 허리는 겉보기와 달리 텅 비었다. 골다공증에 걸린 뼈마디는 공(空)이 되었다. 자신의 최후를 맞이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관을 짜놓은 나무는 쓰러진 그 자리 관이 되어 눕는다.
몇백 년 동안 한자리에 서 있느라 발바닥이 부르튼 뿌리를 본다.
최고 높이에 도달한 순간 비움을 다 한 나무의 생애, 채움과 비움은 동시에 완성된다. 가득 채움에 허기진 이들이 전나무 숲길을 읽고 나면 목표 설정에 도움이 될까.
채움과 비움 나의 부등호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최장 열대야를 경신하는 여름밤 댓잎을 푸드덕 헤쳐 날아오른 넓적사슴벌레를 잡아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검고 딱딱한 갑옷을 입은 녀석은 톱니가 달린 천하무적 집게발을 장착하고서 쇳조각도 우적우적 씹어먹을 기세. 겁 없이 손가락을 맡긴 채 집으로 돌아와서 이불 위에 올려놓았더니 꿈쩍 않는다. 떼려고 하자 이불에 더듬이를 딱 붙여서 이불을 끌어당긴다. ‘어라, 너도 잠이 고픈 거구나.’ 열대야 불청객을 달큼한 향내 나는 노란 분꽃 위에 고이 올려주었다.
이른 아침 들판 산책길에는 누런 금빛 개구리를 만났다. 우렁이가 빼곡한 친환경지구 논바닥은 개구리가 살기 좋은 천국 가까이 다가가도 부동자세이다. 가만히 쪼그려 앉아서 녀석의 다리를 관찰하였다. 최근 구입한 개구리 도자기 인형 다리가 너무 과장되게 벌려져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습이 사실에 기초하여 제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인기척을 느꼈던지 개구리는 유연하게 헤엄치면서 벼 포기 사이로 멀어져 갔다. 사진에 찍힌 녀석 눈을 크게 확대하자 세상에 그 눈동자에 쪼그려 앉은 내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점점 희귀해져 어느 날엔가는 자취를 감추는 멸종위기 곤충들과 교감하는 여름 끝자락.
타향에서 반평생을 꾸려온 나도 화려한 불빛 아래 어슴푸레 수그린 달개비꽃이 아니었을까. 입을 꾹 다문 채 소란스러운 양지보다는 그늘에 스며들었다. 그늘에 스며든 먹물 어둠을 글자로 풀어낸 작가였다. 밝은 곳에 있으면 어두운 곳이 안 보이지만 어두운 곳에 있으면 밝은 곳이 잘 보인다. 어두운 곳도 두 눈을 크게 뜨면 부엉이처럼 잘 보인다.
그렇다고 사회의 그늘에 가려진 약자들의 삶은 잘 알지 못한다. 사회악에 대하여 분개하는 피도 식어버렸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 쓰러진 나무들처럼 뜨거운 여름이 지날 때마다 몇 뼘 성장을 다 한 나의 나무가 쓰러지는 그날까지 채움과 비움의 조화로운 균형 그리고 언젠가는 비움을 다 한 그런 나무가 되고 싶다. 동그랗고 아담한 나의 그늘이 누군가에게 작은 휴식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