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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Sep 04. 2024

고달픈 순간, 꽃이 피었다

 삶에 물기가 마르고 공허한 바람이 겉돌면 찾아가는 곳이 있다.

교외 드라이브 길 우연히 들른 플라워아웃렛, 플랜테리어에 필요한 거의 모든 식물과 화분을 판매하고 분갈이를 해주는 곳이다. 지구별 운행이 성큼 모서리를 돌면서 몸이 쏠리는 느낌이 뚜렷한 이 무렵에는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고 꽃들의 위로가 필요한 시간. 관엽식물 다육식물 행잉플랜트를 지나치며 자연스레 눈길이 머무는 꽃들 중에 요즘 피는 과꽃 국화가 시선을 끌어당긴다.


 집으로 돌아와서 분홍색 과꽃 두 포기, 보라색 과꽃 한 포기를 한 화분에 분갈이하고 연분홍 국화도 토분에 분갈이해 주었다. 투명한 햇살이 머문 창가에 핀 꽃들은 생활의 땟자국을 말끔히 지워주고 차 한 잔을 음미하면서 지금 이 순간 더할 나위 없는 행복, 그 자체로 스며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꽃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향기를 맡은 건 취학 이전 시기였다. 슬레이트 집 오른편에는 흙을 두둑이 쌓아서 벽돌로 경계를 조성한 남향 화단이 있었다. 햇살이 농익던 어느 초여름 난초 무더기 사이로 예쁜 보라색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밝고 화사한 빛깔에 이끌린 꼬마는 꽃을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손을 내밀어 꽃잎을 따서 으깼다. 선명한 보랏빛 즙이 손가락에 미끈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먹을 수는 없는 꽃에 대하여 곱게만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그 꽃이 '자주달개비'란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꽃말은 '짧은 즐거움, 외로운 추억, 존경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이다. 외로운 세상에 태어난 꼬마에게 처음으로 다가와 준 예쁜 꽃 자주달개비, 유아기 나처럼 귀엽고 고마운 꽃이다.


 뒤이어 화단 여기저기 새하얀 대롱이 부풀어 오르더니 꽃가루가 묻은 꽃술에 경쾌한 음표를 얹은 백합이 피어났다. 뜨겁고 푸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같은 백합은 여름의 향기, 젖내 나는 꼬마는 세상이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고고한 향기를 간직한 백합은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될 꽃이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꼬마는 화단을 껑충 뛰어 오르내리며 이 세상에는 신성한 그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파란 바다 물결이 떠밀려오듯 수굿수굿 수국이 피어났다. 여름 화단은 신비로운 빛깔로 일렁거리며 아이의 마음을 멀미 나게 울렁거렸다. 


 국민학교 저학년일 때 슬레이트 집이 허물어지고 초록색 기와집이 새로 지어지면서 화단은 마당 앞 동쪽으로 재배치되었다. 연둣빛 보리순을 나긋나긋 흔들고 지나가던 봄바람이 우리 집 앞마당에 들러 분홍색 자그마한 꽃들을 매끈한 나뭇가지 따라 따닥따닥 붙여놓았다. 박태기나무 꽃이 폈다. 어느새 자줏빛 공단을 차려입은 귀부인 모란이 화들짝 피어나더니 오월의 화창한 아침 새빨간 덩굴장미가 회색 담장 위로 울긋불긋 벽화를 그려놓았다. 정오의 자외선이 뜨겁게 달군 담장을 핑크젤리 구워가며 꼬리를 치켜세운 들고양이가 제 그림자 밟으며 건너갈 적에는 태양을 찌르는 칸나꽃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났다.


 말도 안 되는 똥고집을 부리며 울다가 쫓겨나서 담장 아래 고개를 푹 파묻고 눈물을 훌쩍이던 날도 꽃들이 함께 있어주어 외롭지 않았다. 엄마가 차려주는 쟁반밥 먹고서 정신없이 뛰어나가는 등굣길 골목에서도 고운 꽃들이 손을 살레살레 흔들어주어 용기를 내었다. 나의 유년을 차례대로 채우며 예쁜 단추를 달아준 꽃들을 누가 심고 가꾸었는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알았다. 공직에 계시랴 농사일하랴 바쁜 틈틈이 아버지가 정성스레 심고 가꾼 꽃밭이었다는 걸.


 늘 크고 작은 풍상이 일었던 집안의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소주 한 잔 기울일 줄 모르는 분이셨다. 술이 체질에 맞지 않아서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언제나 정신이 반듯한 아버지는 단 한순간도 흐트러진 모습 보이지 않으셨다. 아버지인들 세상 칼바람이 매섭게 휩쓸고 지나가는 어둑한 저녁 술을 빌어 거나하게 취하고 싶은 날 왜 없었을까. 등이 휘고 어깨가 휘청이는 아버지를 위로하고 어루만져준 건 아버지가 손수 심은 꽃들이 아니었을까. 그런 꽃들이 기다리는 집을 향하여 퇴근길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을 아버지가 귀천하신 지 이제 세 달이 지났다.


 꿈에도 여러 번 나오셨다. 처음에는 영적 주파수를 맞추는 전화가 걸려오며 나를 찾으시더니 평안한 모습으로 우리 집에 찾아오셨고 잔잔한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햇살 가득한 거실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생생한 꿈으로 찾아와 주셨다. 문득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 눈시울 붉은 여름날이 지나갔다. 지금은 무릉도원 천국에서 꽃들과 함께 행복해하실 아버지. 다가오는 추석에는 플라워아웃렛에 다시 들러 아름드리 핀 국화꽃을 아버지 묘소에 심어드려야겠다. 향기로운 국화향을 맡고는 좋아하실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분갈이 한 과꽃 세 포기

 

** 타이틀 사진이 '자주달개비'예요


과꽃

-동요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온 삼 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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