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살던 백운호수로 가을 나들이를 하였다. 서른 중반부터 마흔 중반까지 십 년 가까이 살았던 동네 거기로 가면 언제나 마음이 살강거리고 안도감이 생긴다. 이십 대 때 도로주행 연습하러 서울에서 강사가 가자는 대로 차를 몰고 보니 도착한 곳이 이곳 백운호수였다. 지금 살고 있는 근처 호수에 비해 크기는 아담하지만 언덕 너머 둑방길이 걷기에 운치 있고, 이름 그대로 흰 구름이 둥실 수면에 비쳐 하늘이 가까이 내려오고, 내 마음도 살갑게 비쳐 성찰하기 좋은 곳이다.
만추에 이르러 황금 들녘을 기대하고 왔는데 그새 호수 주변 정겨운 논두렁 길은 데크길로 모두 바뀌었다. 통나무 라이브 카페도 카페를 둘러싼 널따란 전답도 철거된 그 자리 공원을 조성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흙길 구간이 없어져서 신발에 흙 묻을 일이 없어진 그 길, 호수 물은 자정작용으로 투명한 가을빛이 넘실거렸다. 이제 태양이 기울면 저 멀리 치솟은 관악산이 산불이 일듯 붉은 노을이 옮겨 붙어 활활 타오를 것이다.
어린 딸 둘을 키우면서 독박육아에 지친 주말이면 어김없이 이 호숫길을 돌며 심신의 위로를 받았다. 물만 보면 숨통이 트였다. 무거운 짐을 넣어두는 내 개인 사물함이 저기 수중 저장고에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이 가벼운 발걸음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은 이전보다 더 사랑스러워지고 남편은 주말부부 지방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지금 그리운 것은 그 시절 내 모습이 여기 그대로 투영되어 흑백필름 돌아가듯 재생시켜 주기 때문이다.
추억이 물들어 말랑말랑해진 마음으로 근처 쇼핑몰에 들렀다. 올 한 해 알차게 살아서 촘촘한 열매를 매단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땅거미 지는 실외 공간을 어슬렁거렸다. 동녘 산허리에 걸린 분홍색 구름이 누군가를 내다보듯 설레는 이 저녁을 버선발로 마중 나왔다. 은은한 노을빛을 반사하는 세모꼴 통유리 집들(가게) 사이로 오롯이 난 길은 평지에서 공중으로 부양되는 정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수크령 쑥부쟁이 억새들이 나직이 스며드는 어둠을 빨아들여 어둑하게 나부끼는 길에 홀린 듯이 이끌려 걸음을 옮기는데 유난히 목청이 고운 새소리 들려온다.
눈치 채지 못하게 가만가만 다가서자 통통한 몸통에 밝은 갈색 깃털을 단장한 새가 사과나무에 앉아서 이 저녁에 어울리는 노래를 부른다. 머리에는 실크 느낌 은색 모자를 쓰고 날개 깃털은 흰색 얼룩이 섞인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었다. 아, 이 멋쟁이 새는 어쩜 내 마음과 똑같을까. 저도 나도 시월의 아름다운 저녁을 찬미하는 휘파람을 부르고 있었다. 이집트 기자 지구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유리 집들이 화려한 샹들리에를 불 밝히며 빛의 카니발이 시작되는 시각 해가 슬며시 미끄러짐과 동시에 초여드레 조각달이 짙은 청자색 하늘 위로 새뜻하게 떠올랐다.
작은 길을 누비는 가로등이 일제히 점등되고 발갛게 단풍 든 복자기나무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조각달을 영접하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 자연의 완벽한 구도를 구현해 내었다. 순간 모든 빛과 전망을 조망하는 저 유리집에 들어가서 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 빛나는 유리집의 안주인이 되고 싶다.' 첫서리 맞을 때까지 새빨개지는 사과를 디너 정찬으로 삼는 작은 새를 매일 저녁 반갑게 맞아들이고 잘게 부서지는 차가운 겨울빛이 저 유리에 비쳐 아침을 깨울 때까지 어깨에 숄을 두른 파리한 얼굴이 되어 시를 쓰다가 사색이 막히면 구깃구깃 종잇조각을 던지면서 체념해도 좋으리.
우주의 운행이 잠시 숨을 고르며 시간이 멈추었다. 과거로 거슬러 오른 물결이 되돌아와서 지금 이 기슭에 고요히 머무른다. 먹물 어둠이 고삐를 풀어 밤이 천천히 다가오거나 말거나 이 저녁을 놓치고 싶지 않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건 진실한 숨결이 행복을 누리는 그 순간 불완전한 존재의 의미는 완전해진다. 뻣뻣이 고개 든 이성이 제풀에 꺾여 감성에 온전히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쌓아 올린 가치관의 뾰족한 첨탑은 무너지고 만다. 불가사의한 피라미드의 정체성 또한 별자리와 나란히 순열을 맞춰 누군가의 감성을 자극하고 순수해지면 그만이다. 때로는 이성으로 찾지 못한 해답을 감성이 알려준다.
며칠 전 큰딸이 자기 돌 비디오를 찾다가 낡은 조덕배 테이프를 발견하고서 갖다주었다. 흐릿한 활자체 A면, B면을 살펴보다가 어떤 노래 제목에 눈길이 쏠렸다. '물안개꽃' 풋풋한 그 시절 이 노래 참 좋아했었다. 싱어송라이터 조덕배는 천재이다. 애틋하게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몽환적인 느낌을 목관악기로 전개하는 도입부는 바로 이 무렵 물풀이 이울지는 어느 희뿌연 강가로 이끈다.
안개가 스민 그의 목소리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개를 닮았다. 차가운 안개보다는 눈가에 촉촉하게 스며드는 따스한 안개.. 철없던 그 시절 듣던 이 노래와 지금에 이르러 듣는 느낌이 같을 수야 없지 않을까. 몇십 년을 훌쩍 건너뛴 노래의 애잔함이 더 진하게 가슴을 후벼 판다. 백운호수가 바라보이는 공중정원에 올라 감미로운 분위기에 어울리는 '물안개꽃'을 듣는다. 뒤이어 '문리버(Moon River)'를 듣는다. 이 아름다운 저녁을 위무하는 아름다운 노래 오래오래 잊히지 않으리...
내 맘에 심어논 그대의 모습이여
물안개꽃보다 더 쓸쓸한 얼굴이여
으흐흠
간 곳 없는 그대의 애처로운 그 모습
연기 속을 사라진 희미한 얼굴이여
사라진 그 모습이 무지개 저 편에서
미소 띠며 올 나를 바라보네
하늘에 점점 가까워지면
내 사람아 나를 데려가주
그곳으로 평화로운 곳으로
내 맘에 피어난 그대의 영혼이여
밤안개보다 더 희미한 얼굴이여
으흐흠
간 곳 없는 그대의 애처로운 그 모습
안갯속을 사라진 희미한 얼굴이여
사라진 그 모습이 무지개 저 편에서
미소 띠며 올 나를 바라보네
하늘에 점점 가까워지면
내 사람아 나를 데려가주
그곳으로 평화로운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