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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Nov 06. 2024

찬밥 더운밥 가려야 할 때


  가을인가 싶더니 입동을 앞둔 일교차는 점점 벌어져 새초롬한 겨울의 모서리를 향해 시간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갈색 주황색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이 점묘법으로 툭툭 칠해진 집 앞 공원에는 스산한 바람이 내려와 나뭇잎을 밤새 뒤척이고 한 가지 시름이 맺힌 나의 불면증은 담요를 뒤척이게 만든다.


  절반은 떨어지고 잎이 성글게 매달린 벚나무에 나뭇잎보다 더 붉게 나뭇가지를 휘감은 담쟁이덩굴을 보았다. 얼핏 보면 유달리 고운 나무라서 눈길을 끄는데 벚나무를 더 빛나고 아름답게 장식한 건 슬며시 이주해 온 담쟁이들이었다. 피아 구별 없이 한 몸처럼 얽혀서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로서 나부낀다. 뿌리와 본성은 달라도 한집에서 한솥밥 먹고 살면 저리 닮아지나 보다. 


  그걸 물듦이라 말해도 좋으리. 비슷한 생각, 비슷한 가치관으로 한 줄기에 붙어 살아가는 우리도 같은 빛깔로 물들고 있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자세히 보면 벚나무 잎은 타원형이고 담쟁이는 삼각 뿔이 달린 원추형이다. 빛깔도 벚나무 잎은 갈색이 도는 밝은 주황빛이고 담쟁이는 천연염료를 뽑아도 좋을 만큼 새빨갛다. 생김새와 빛깔에 미묘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 가지 색으로 닮아가면서 벚나무 잎이 먼저 다 떨어지고 나면 담쟁이는 홀로 남아 나목의 비관적인 처지를 그나마 가려주고 위안이 되어 줄 것이다. 성장기에 여백을 내어주고 그늘을 제공한 보람 아닐까.


  지천명 언덕에 오르고 보니 잎을 떨군 나무들이 훤하게 산길을 내듯이 지난 여정이 눈에 선하다. 숨이 부대끼는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내 걸음이 숨차서 남의 처지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겨울이 닥쳐오기 전에 내 살길을 부지런히 도모하기 바빴다. 작은 언덕을 올랐을 뿐이고 잠시 바윗돌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고 보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말 저녁에 연어 샐러드를 먹다가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훈제 연어 양파 치커리 케이퍼 파프리카를 소스에 버무려 먹는데 너무 산뜻하니 맛있어서 지난해 아버지가 오셨을 때 이 음식을 대접해 드렸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맛있는 식당에 가도 늘 꼬리표처럼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여기 모시고 올걸. 최근 제부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문안 가면서 동생을 만났다. 그새 수척해진 동생 얼굴을 보니 안쓰러웠다.


  요식업을 운영하는 동생은 고생이 많은 편이다. 집은 서울인데 식당은 경기도에 있어서 출퇴근 거리가 멀다. 남들 자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고된 생활을 하고 있다. 주말에도 한가할 틈 없이 시장을 몰아서 보는 눈치다. 한 지붕 아래 자랄 때는 같은 자매끼리 오가는 말이 거침없었지만 성인이 되고부터는 각자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가기 바쁘다. 그 선택에 왈가왈부 개입할 수도 없고 서로 무탈하게 잘 살아가길 지켜보게 된다. 


  처음이었던 것 같다, 동생에게 쓴소리 한 게. 

"우린 인생의 가을을 넘어가고 있어. 곧 추운 겨울이 닥친다. 네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니?"

말을 툭 내뱉고 보니 찬밥 더운밥 가려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동생에게는 더운밥을 선택할 여지가 남아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동생은 지금 찬밥을 먹고 있었다. 

다시 말했다.

"찬밥 먹지 말고 더운밥 먹어, 응?"


  저녁밥을 짓다 보면 아침에 해놓은 찬밥 한 덩이 남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찬밥 분량을 생각해서 쌀을 좀 덜어내고 밥을 짓는다. 그런데 식구 한 사람이 저녁을 먹고 들어오게 되는 경우 따끈한 밥이 밥솥에 덩그러니 남게 된다. 그러면 당신의 선택은 어떠한가. 먹으려고 따로 퍼놓은 찬밥을 데워서 먹게 되면 고슬고슬 먹기 좋은 밥이 식은밥이 되고 만다. 목이 메는 찬밥은 냉장고로 직행, 살강살강 부드럽게 씹히는 더운밥을 맛있게 먹는 게 지금 당장 나를 위해 좋은 선택이다. 더운밥을 놔두고 굳이 찬밥을 먹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관성의 법칙은 생활에도 적용된다. 시간에 쫓기고 허둥지둥 정신없이 살아가다 보면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음에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의 틀에 갇히게 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어딘가에 양도한 채 앞만 보고 살고 있진 않았던가. 살다 보면 서러운 찬밥 한 덩이 꾸역꾸역 삼켜야 할 때 있다. 야박한 시간이 내민 독촉장에 휘둘릴 때가 있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하면 육신을 보전하는 그 밥조차 먹기 싫어 굶기도 한다. 모래알처럼 입안에 굴러다니는 밥알은 뱉는 것이 낫다. 


  와인과 치즈, 이것만 있으면 위안이 되는 몹시 어두운 저녁 사물을 삼키는 그림자와 한편이 되어 우두커니 자신을 성찰한다. 집채만 한 삼각파도에 난파당하는 자신을 타인처럼 관망하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인과고리를 해체하면서, 와인 반 잔에 함유된 알코올이 혈액을 타고 정신을 약간 혼미하게 만드는 찰나 마침내 얻어낸 결론 그것이면 배고픈 줄 모르고 그 밤이 지나간다. 


  그렇다고 뾰족한 돌파구를 창출하는 결론은 아니다. 무력하게 허물어진 감정을 복구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면서 자신을 연민하는 쓰라린 밤이 지나간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결론이다. 불편한 문제의 50%는 시간의 등에 기대어 수동적으로 해결되기에 조바심만 거두면 된다. 나머지 50%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약간의 지혜를 짜내면 엉킨 실타래가 술술 풀린다.


  청춘은 찬밥 한 덩이조차 뱃속에 들어가면 뜨거운 밥이 돼준다. 알아서 데워지고 알아서 소화되는 피가 뜨거운 시기 그깟 찬밥 한 그릇쯤 먹더라도 뜨거운 밥이 되어 줄 미래가 창창하다. 중년에 이른 그대 아직도 찬밥을 먹고 있진 않는가. 


  양지와 그늘의 채도가 점점 더 선명해지는 이 가을 나뭇잎 지는 양지를 바스락 소리 내며 걷는다. 텃밭을 지나는 길에 곁에 따라오는 들깨 향이 무척 향기롭다. 손바닥으로 쓱 훑어 들깨 향을 맡는다. 내 허리춤에 찰랑거리는 들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내어주는 향기 한 줌 주머니에 훔치면 심신이 평안하고 상쾌해진다. 


  멀고도 가까운 길이 굽이치며 저만치 안개에 잠겨 뻗어있는 그 길.

오늘 걷고 있는 이 길이 직선이 되었다가 곡선이 되었다가 수평선으로 수직선으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린다고 해도 그 선의 본질은 같은 것이다. 일정한 두께와 색상으로 실선이 되었다가 점선이 되었다가 끊어진다고 해도. 무수한 시간의 점들이 찍힌 인연을 싣고서 화살표 하나 고요히 나아간다. 









벚나무 잎과 담쟁이의 아름다운 공생
가을 물이 드는 백운호수
우선국(아스타)..물어서 알게 된 이름, 요즘 이 꽃이 가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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